김임선 시인 / 사과나무와 뱀과 그림자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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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선 시인 / 사과나무와 뱀과 그림자 깊은 산 작은 연못에 뱀 한 마리 살고 있어 어여쁜 연못 옆에는 초가지붕을 닮은 아담한 사과나무 한 그루 시절을 엿보고 있네 노랑 꼬리 새는 사과나무에 앉아 푸른 사과와 소곤대는 데 무슨 비밀이 저리 깊고 농염할까 노랑 꼬리를 갖고 싶은 뱀이 어느 날 사과나무를 향해 높이 날아오르네 아마도 노랑 꼬리 새 따먹었을 거야 우리 아버지 휴가 받고 산에 갔다가 길을 잃었는데 산속에서 그 연못가 사과나무를 만났거든 사과나무 빨간 사과가 하는 말 나무꾼님 나무꾼님 나는 맛이 없어요, 오는 길에 혹시 노랑 꼬리 뱀 못 보았나요? 노랑 꼬리 뱀이 나보다 백 배는 맛있어요 귀 얇고 눈 어두운 우리 아버지 빨간 사과한테 속아 노란 꼬리 뱀 잡아먹고 날 낳으셨어 나는 노란 꼬리 뱀 어여쁜 어느 날 사과나무를 향해 높이 날아오르네 아마도 빨간 사과 한 알 따먹었을 거야 그날부터야 내 속에서 파란 사과 빨간 사과 쉬지 않고 싸움질이야 나는 그 사과 사탕을 먹듯 먹어버렸는데 더 많은 사과 내 속에서 알을 낳고 알을 까고 사탄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분탕질이야 아버지의 그림자 내 속에서 천천히 나를 되새김질 중이야 나는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빨간 사과 어디에 숨어 있는가 빛도 없이 그림자도 없이 나를 훔쳐 먹은 노랑 꼬리 새
김임선 시인 / 동백낙화
어쩌자고 배꼽은 자꾸 빠지는 걸까
소복한 겨울을 막 열고 내다보는 눈이 있다 너는 아직 감기가 덜 나았다 쿨룩쿨룩 기침을 할 때 덜컹덜컹 배꼽이 요동친다 펄펄 끓는 꼭지를 차갑게 녹여서 전화선을 꺼낸다 콧구멍에서 콧소리를 꺼내듯이
괴물이 끌려 나온다 쇼핑 카트는 거대한 쇼핑센터와 연결되어 있다 나사 풀린 냄비 뚜껑처럼 손잡이를 조이고 여보세요? 부르면 응답한다
배꼽티는 배꼽과 연결되어 있고 전화를 걸면 곱창 같은 길을 따라 구불텅구불텅 목구멍이 끓는 소리 맵다
여보세요? 자기는 출발했어?
보르도 와인 잔에 자기를 담고 싶은 마음으로 쇼핑 카트를 민다 어쩌면 자기야 못 갈지도 모르겠어 독감이 맵고 독해서 등 떠밀려 쇼핑센터를 빠져나온 고장 난 도르래 없는 애인이 배꼽을 한 개씩 던져서 분수대 구멍을 메우고 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붉은 눈웃음이 싹뚝 잘린다
동전 들어가는 구멍을 못 찾는 손님이 나처럼 또 있다
아이스크림을 훌쩍이며 아이는 서 있고 저 여자가 내던진 장바구니에서 양파 구르고 등 돌린 토마토 입 다문 멸치 냉정의 턱에 걸려 바퀴는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동백 낙화 배꼽의 꽃말
김임선 시인 / 파도를 나무라 부르고 숲에서 물고기 한 마리 구하네
나는 지금 바다에 빠져드는 깊이 고기 잡는 어부가 되어 두꺼운 장화 신고 물보라 되어 등 푸른 작업복을 갖춰 입고 내 주머니에는 낡은 수갑이
나는 물고기 한 마리 신께 바칠 높이 물의 비명을 견딜 귀마개는 내 목에 걸려 있어
나는 바다야 오래 전부터 너의 발소리를 예감했지 눈을 감지 않고도 느낄 수 있어 바다에 바람이 일지 않는 날 어디 있었니 너를 상상했어 오래 널 기다리며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네
너는 무자비할 것이며 너는 음흉할 것이며 너는 어리석을 것이며
나는 바다를 빠트리는 그물이야 너의 허리춤에 매달려 의기양양한 수평선을 정복하는 거야 내 운명은 그물 잣는 노인의 결심이었거든 오래 벼린 나는
파도 한 그루야
나는 파도 파도 한 그루야
나는 수많은 파도 한 그루야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 보겠어 뛰어 보겠어 미쳐 날뛰어 보겠어
나는 해변을 기웃대는 먹구름이야 뿌리는 너에게 있고 저녁의 바람이 나를 흔드네 내 창자를 펌프질하네 왈칵왈칵 구역질이 피네
휘파람을 펄럭임이라 부르고 펄럭이는 물보라를 나비라 부르고 당신이 목격한 절정
그 속으로 깊이 배 저어가네
나는 바다를 건너는 나비 한 마리야
나는 나비 나비 한 마리야
나는 수많은 나비 한 마리야
날개를 파도라 부르고 파도를 나무라 부르고 환하게 물고기 날아오르네
나는 바람을 해방이라 부르는 파랑이야
김임선 시인 / 목성의 날
시외버스 터미널에 공중전화가 있어요 19시 10분이에요 우리는 같은 시계를 보고 다른 시간을 골라요 다른 방향을 보고 선 채 손을 맞잡는 등 뒤의 사람들 같아요
진열된 벽의 숫자를 오래 들여다봅니다 숫자를 연구하면 세상이 보인대요
다른 숫자를 보지만 같은 곳에 도착하는 사람들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저기 시간을 타고 달려오는 웃는 여자가 있어요 웃는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바통터치
뭉기적거리며 우리가 떠난 자리에 그렇게 도착하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이어지는 관계 관계되는 관계 우리 오늘 밤 뭐 먹지? 번식하는 관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장어를 먹으면서 팔굽혀 펴기 번뇌하는 관계
당신은 첫사랑 떠난 자리에서 무한으로 기다리는 무한의 첫사랑 어디까지 갔어요?
사랑은 금성에 토성에 있고 지구도 지옥도 안 보이는 곳 목성의 시간이 별처럼 반짝이는 곳 끝날 것 같지 않은 길이 깊어질수록 외로움을 쿨룩쿨룩 의자 깊숙이 밀어 넣는 소리 종점이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종점에 닿아야 하기에 종점을 기다립니다 종점은 아직 멀었습니까
노 젓지 않는 배가 줄에 묶여있고 노 젓지 않는 배가 유리창을 달립니다 앞과 뒤 사이 가운데 거기 어디쯤 껌 씹는 사람 머리 위에 무성의 영화가 켜져 있습니다 종점에 내리면 영화는 끝나지 않고 유리창 너머에 웃는 남자는 없어요 웃는 여자가 허기진 웃음을 계속 웃으며 비라도 오는 날에는 떠도는 사이가 밤의 오지를 오래 배회합니다
목성은 멀었습니까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김임선 시인 / 색안경을 쓰는 일 안경을 쓰면 돌은 달이 되기도 합니다 달은 둘이 되기도 해요 달의 종족은 돌을 키우는 것이 목적일까 둘을 키우는 것이 목적일까 생각하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이번 생은 말이에요 달이 없는 곳에서 돌은 돌을 알아볼까 돌이 없는 곳에서 달은 돌을 알아볼까 돌의 동족은 달 아닐까 깨진 달의 액정에 식은땀이 맺혔어요 달을 시청하는 소파가 안경다리에 매달려 색안경을 쓰는 일 여름날 물가에서 돌에 들면 달의 세상이 보입니다 그 바다에 동단배 떠 있으면 나는 망망합니다 너와 내가 짝을 먹고 색유리를 통과하는 시간이 오고 있어요 색은 빛을 따라 달리고 정체된길에서 점점 어두워지는 너의 낯빛 그 위로 빗줄기가 우거지고 쓰러지고 뒤엉키고 있어요 우산이 비를 따라 달리네요 의심은 우산을 쫓아 달리고요 쫓다가 코너에 몰리면 눈만 가리면 그만입니다 우산을 쓰면 둘은 하나가 되기도 해요
김임선 시인 / 썰물
동막에 갔다 탈피하는 게를 보았다 오래전 나는 여기에서 전생을 벗었다
김임선 시인 / 헐! 우리 집에 개 한 마리 살고 있다 너는 우리 집에 개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우리 집에 사는 내가 우리 집에 개 한 마리 산다고 말하고 우리 집에 살지 않는 네가 우리 집에 개 한 마리 안 산다고 나는 커다란 거짓말쟁이가 된다 우리 집은 개 두 마리도 살 수 있다 개 열 마리도 살 수 있다 우리 집 개는 창문을 열고 아침을 밝히고 내 잠을 깨운다 우리 집 개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뉴스를 읽어준다 우리 집 개는 뉴스 다음에는 일기 예보를 읊어준다 우리 집 개는 노래도 잘한다 우리 집 개는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가기도 하고 우리 집 개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오기도 하고 우리 집 개는 아침에 왔다가 오래 눌러앉기도 한다 너는 개가 아니니? 워엉! 워엉! 워엉! 월월월 우리 집 개가 크게 할(喝)을 하고 납작 엎드린다
김임선 시인 /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 찾기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사탕 있는 남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혹시, 당신의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어머,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도둑 아니고 강도 아니에요 당신의 왼쪽 바지 주머니라 해도 상관은 없어요 당신의왼쪽 심장이라 해도 상관없지요 사탕 있으면 한 개 주실래요? 에이, 거짓말! 나는 당신의 주머니를 잘 알아요 한번 만져볼까요? 꽃뱀 아니구요 사기꾼 아니에요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그럼 당신 손으로 당신 주머니에 손 한번 넣어보세요 어머, 그것 보세요 사탕이 남아 있다니 당신에게 애인이 없다는 증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주머니에 들어갔는지 당신은 모를 수 있어요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사탕 한 개씩은 들어 있어요 사랑 말이에요 세균처럼 바이러스처럼 그 사탕 나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해요 유난히, 망설이지 마세요 그 사탕 내게 주면 당신 주머니에는 또 다른 사탕 생길 거예요 사랑처럼 말이에요 경험해보지 않으면믿을 수 없는 일 맞아요 사탕대신 꽃은 어때요? 어머, 꽃 피우는 당신 마법사였군요 꽃을 나눠 가진 우리 이제 달콤해집니다 -신춘문예 등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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