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숲 시인 / 수조가 있던 자리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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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숲 시인 / 수조가 있던 자리
어항 속 열대어들처럼 그들은 자주 몰려다녔다 누군가 수조에 먹이를 던졌고 그들은 동시에 달려들어 서로의 비밀을 뜯어먹었다 식탁 위 숟가락과 젓가락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엄마는 쉴 새 없이 메뉴에 레시피를 추가했다 치어들은 어른들의 주위를 헤엄치며 관심을 끌었고 이따금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루머는 나선형으로 퍼져나가는 성질을 지녔다 누군가 외발로 선 친척 언니를 메뉴에 추가했다 순식간에 몰려든 그들은 언니의 눈동자를 제거하고 머리를 잘라내 비늘을 벗긴 뒤 팔과 다리와 가슴과 배를 차례로 토막 냈다 언니가 매운탕 그릇에 담겼다 여러 개의 숟가락이 다투듯 움직였다 그들은 외발로 선 언니의 아이까지 국물로 우려내어 모조리 빨아먹은 뒤에도 식탁을 떠날 줄 몰랐다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넣느라 엄마는 식탁에 끼지 못했다 이후에도 낱낱 벗겨진 비늘 아래 자줏빛 멍울을 숨겨둔 어린 소녀들이 식탁 위에 올랐다 미역 머리를 한 젊은 엄마와 물에 빠져 죽은 아버지가 식탁에 올랐지만 너무 뻔한 메뉴에 그들은 하품을 남기고 하나둘 떠났다 그제야 식탁에 앉게 된 엄마는 소문의 찌꺼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고, 나는 지저분한 식탁 구석에 앉아 헝클어진 엄마를 천천히 먹어치웠다
박숲 시인 / 유령 놀이 1
손바닥에 희미한 빛을 쥐고 중환자실로 들어간 애인은, 너무 쉽게 돌아왔다
새벽바람으로 빗방울로 보도블록 틈새의 풀잎으로 한밤의 휘어진 골목으로, 헐거워진 문틈으로 현관의 검은 우산으로 마모된 칫솔로 짝 잃은 양말로 베갯잇 머리카락으로
애인은 내 눈을 파고들다 심장 안 파닥거리는 새가 되었다
며칠 만에 찾아낸 애인은 우산을 들고 계단 아래 쪼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빗방울에 걸린 거미줄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거미가 빗방울을 털어내는 동안 애인의 머리와 어깨가 빗물에 잠겼다
집을 잃었어 수시로 숨어 버리는 애인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바람을 쫓던 눈동자가 좁은 골목을 비척이며 걸었다
가파른 절벽이 애인을 앞섰고 나는 애인의 뒤를 쫓는 절벽이 되었다
애인은 한밤의 숲에서 유령놀이에 빠졌고 풀벌레가 된 나는 가을 내내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풀숲을 떠돌았다 -계간 『시에』 2024년 겨울호 발표
박숲 시인 / 그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숲길 벤치에서 만난 루이는 사일런트 기타*를 안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이 현을 누르면 가느다란 어둠이 눈물을 흘렸다
소리를 왜 죽이나요?
밤새 나를 연주해야 해요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없는데
그의 잠은 도무지 얇아서 꿈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의 음악은 진짜와 비슷했고 타이밍에 실패한 이야기는 지루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치는 것이 많았다
루이의 입술 사이로 파르르, 죽은 형을 위한 노래는 풀벌레 소리보다 가늘었다
그의 몸에 들러붙은 파리한 영혼이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왔고 달아나도 달아나도 길은 끝날 것 같지 않았고
기타 현 속으로 숨었을 때 가장 안전해 보였는데
앙상하게 깊어진 어깨뼈의 슬픔에 대고 속삭였다
멋진 추억을 만들어 줄게!
그의 입안에 하얀 생크림을 떠먹이며 차곡차곡 현재를 키웠다
너는 지구에서 가장 먼저 뜨는 해야!
점점 두꺼워지는 거짓말은 얇아진 경계를 무시했고
손끝으로 부르던 그의 노래가 여름밤 풀벌레보다 무성해졌을 때 그는 여름 숲에서 문득
사라졌다
무성한 소문만 남겨둔 채
해마다 8월이면 여름 숲에 앉아 루이로부터 시작된 구름을 세다 보면
그가 나인지 내가그인지 이탈의 꿈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박숲 시인 / 적란운
내 몸의 습기는 나와 상관없이 발생하지 저만치 네가 걸어오고 있었어 오래된 생일을 안고서 그 어딘가 너의 하늘을 숨겼던 쪽에 기대고 싶은 적도 있었지 먼 곳을 돌아 다시 만난 우리는 각자의 표정으로 하늘을 가렸지
불판 위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는 동안 너는 집게에 걸린 말들을 가위로 뚝뚝 잘랐어 무언의 비난이 들렸지 목소리는 가파르고 날카로웠어 네가 잘라놓은 불만이 불판 아래로 흘러내렸고 나는 세빛섬 위로 층을 이루며 솟구치는 구름이 되었어 “할 줄 아는 게 뭔데?” 네 손에서 집게가 떨어졌고 나는 엎어진 컵이 되어 콸콸 쏟아졌지
너의 입안에서 타버린 언어가 씹힐 때마다 움푹 팬 볼이 비틀렸다 제자리를 찾기를 반복했지 허상과 환상이 곳곳으로 쌓이다 균열이 났고 미세한 틈새로 수증기가 스며들었지 모든 것이 우기에 잠긴 것은 순식간이었어 속에 쌓지 말고 꺼내 보라던 것이 불만인지 위선인지 “너는 입이 없어?” 네가 푸른 번개를 번쩍 터트렸지 입이 없던 나는 순식간에 타올랐고 몸집을 부풀린 검은 구름이 솟구쳐 한꺼번에 쏟아질 기세였지
너의 사소한 기류를 이해 못 한 건 잘못이 아닌데, 속에 쌓아둔 층층의 구름이 지겹다고 했지 손가락 사이로 젓가락이 미끄러졌고 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 젓가락의 유착은 생각보다 질겨서 한쪽으론 아무것도 집을 수 없었고,
아무리 닦아도 앞섶에 남아 있는 얼룩처럼 너는 닦이지 않았지
박숲 시인 / 그림자 태우기
1. 꽃무늬 바지와 삼선슬리퍼의 당신을 소각로에 던져넣었어요
불길에 타닥타닥 겨울의 뼈가 타들어 갑니다
보리자 나무 그림자가 거미줄처럼 뻗어 나와 끊어진 경전을 이어가지요
오래전 버렸다는 당신의 이름
사십구일 동안 이레마다 불려지면 당신은 얼어붙은 밭이랑을 뒤지며 찢어진 셔츠처럼 어쩔 줄 몰라 하겠죠
연분홍 치마의 시간을 찾고 있나요 풀꽃 수 놓인 꽃신을 아직도 품고 있나요
당신이 알았던 이름들이 힘겹게 타올라요 불쏘시개를 휘젓던 당신은 불길이 뱉어 놓은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콜록거리겠죠
불 때는 것을 좋아했던 당신
겨울이면 마당 한구석 아궁이가 되어 푸르던 시절의 인연을 피어올리다 사그라든 잿빛 향을 끌어안았죠
2. 검은 연기 사이로 새하얀 눈이 당신의 걸음처럼 소복소복 내려앉아요
잿더미 위로 당신이 켜켜이 쌓이는 동안 보리자나무 걸음이 더디게 다가오고 저절로 시간은 익어가지요
당신이 모조리 타기도 전 온 생을 통해 익혀온 이름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소각로 지붕 기왓장이 검은 물을 뚝뚝 떨어뜨려요
췹췹 췹 췹 어디선가 검은머리쑥새의 울음이 눈밭에 발자국을 찍어요
눈 위로 얇게 가라앉은 당신
재와 눈이 눈과 재가 층층이 적막을 쌓아가는 동안, 연분홍 치맛자락 기척이 남겨진 이별을 단단히 움켜쥡니다
-계간 『시와 산문』 2024년 봄호 발표
박숲 시인 / 원숭이가 미끄러지다 이국의 낯선 마당에 들어섰지 만개한 배롱나무꽃이 붉게 웃었고 처음 보는 얼굴끼리 꽃을 피웠지 과장된 웃음은 시작의 언어 적당한 무게의 캐리어를 이끌고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지 바다에서 묻어온 바람이 따라 들어왔지 발자국을 찍으며
거실 바닥으로 이국의 언어가 모래처럼 흩어졌지 통하지 않는 말 대신 좀 더 많은 웃음을 제조하려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헛웃음 창 너머 여름이 저 혼자 뜨거운 언어를 쏟아내는 동안 우리는 이해라는 것이 좀 더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지
틈새는 점점 교묘해지고 우리는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낯선 풍경을 매달고 왔지
식탁에도 욕실에도 침실에도 여름이 몰고 온 눅눅한 바람이 메마른 모래를 흩뿌렸지
주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의 지루한 표정이 내 얼굴로 건너왔고 나는 서둘러 떨어진 꽃이 되었지
캐리어 뚜껑을 열고 달궈진 열도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집어넣었지
창문 너머로 백 일 동안 꽃을 피울 배롱나무 가지가 흔들렸고 바닥에는 분홍색 꽃잎이 수북했는데 내가 아는 유일한 이해였지
이국의 원숭이가 된 우리는 나뭇가지 틈새로 자꾸만 미끄러졌고 찢긴 얼굴들이 바닥으로 수북하게 쌓였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온도가 대치했고 어긋난 주파수가 지직거렸지
사루 스베리!
창밖 꽃나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깔깔 소리 내어 웃었지 단절된 언어가 나뭇가지 아래로 혀를 빼고 미끄러졌지
꽃나무 아래 분홍빛으로 흩어진 마음을 주섬주섬 챙겨 문을 나섰지
주인의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었지 그제야 만개한 주인의 표정
처음 만났을 때 지었던 웃음이 가볍게 치솟아 배롱나무를 흔들었지 *‘배롱나무’를 일본에서는 ‘사루 스베리’라 부르며, ‘원숭이가 미끄러지다’로 해석한다
-계간 『불교문예』 2024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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