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은 시인 / 작은 것은 위대하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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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은 시인 / 작은 것은 위대하다
고요가 흔들리는 날 발이 간지럽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한 줌 밑에서 궁리의 시간이 싹트는 눈
세상에 나오는 일이 나를 반음 내려놓고 세상과 타협하는 까닭이었음을
솜털 같은 순이
솟아오르는 날에는 하늘도 고요하다
전가은 시인 / 수박 속은 빨개야 맛있다
명제의 성립은 안일까 밖일까 도대체 그 속을 모르겠다 초록과 빨강 사이 노랑이 등장하면서 수박의 혁명이 일어났다 딸들에게 멍멍 짓밟히면서도 빵빵 춤추는 수박 터진 수박 진미를 보려고 눈과 귀를 열었다 소리를 들어 보면 안다 줄기가 마르면 된다 밑이 촘촘하면 된다 겉이 매끈하면 된다 텃밭에 수박 심어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두드려 보고 드디어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싶어 세상에 뛰어들었다 초록 세계가 열리는 날 하얀 속살에 선홍빛 그믐달과 초승달이 하얀 별을 품고 사이좋게 떴다 검은 그림자가 먼 저 세상 아름다운 세상에 헛살았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전가은 시인 / 통증
다섯 살 동생을 데리고 엄마가 떠나던 날 뒷산 비둘기 꾸륵꾸륵 울었다 참꽃은 피어 산기슭이 환하고 부드럽고 화창한 봄바람 나뭇가지를 감돌았다 재산이라고는 아버지 쌓아둔 도박판 빚더미 가진 것이라곤 똥밖에 없다 똥이라도 가져가라 빚쟁이들에게 호통치던 할머니 할머니가 되어 마디마다 울음 얹혀놓고 아파 아파하는 엄마 옆에서 나도 엄마 없이 꾸륵꾸륵 앓던 아홉 살의 봄 시큰거린다
-시집 <가을은 입술에서 온다>에서
전가은 시인 / 생명에로 서
비릿한 냄새가 난다
왈칵 쏟아진 육삭동이 양수 끌어올린 언덕바지 청매화 피었다
광목에 싸여 어디론가 사라졌던 애린 것이 아장아장 걸어와 물오름 달 아른거릴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기억의 조각들 다부지게 꽃 피울 줄이야
햇살 다독이며 꽃잎 사이 오가던 노랑나비 한 마리
살포시 꽃잎인 양 어깨에 앉아 나부낀다
-시집 <가을은 입술에서 온다>에서
전가은 시인 / 흔들리다
고요가 흔들린다 가깝고도 먼
벚나무 잎들이 나부끼는 창가 흔들려야 관계 맺을 수 있는 사이
새가 앉았다간 자리 철철이 바람 불고 새순이 돋고 꽃이 피었다
너와 내가 흔들리던 날 다정과 냉정 사이 새순이 돋고 꽃이 폈다 졌다
네가 흔들린 자리에서 내가 내가 흔들린 자리에서 네가
있다, 있었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전가은 시인 / 네모난 집은 불안하다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감는다 아랫집을 생각하며 윗집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생각하며 밀린 원고를 생각하며 몰래 모텔을 빠져나오는 여자 처럼 조심스레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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