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금 시인 / 시인의 배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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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금 시인 / 시인의 배
오늘을 퇴직한 시인은
자기위로행위를 하면서
'한 시대의 작가'라는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래도 시인이다
죽음의
고운 배를 이른 저녁강에 띄울줄 아는
이병금 시인 / 그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
‘허송세월’을 찾아간 것은 그 이름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그곳이 산 아래, 길 끝에 있다는 그 한 구절이 마음을 움직였다 게스트하우스 이용안내문에 저녁 식사는 제공되지 않았고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특별한 방의 창 너머엔 비스듬히 산이 누워있었다 동네에선 흔한 산이었으므로 그 산을 오를 마을 사람도 없을 테니 그 집에 둘러쳐진 울타리 같았달까 유리창 너머 둥근 창처럼 달도 떴다
찌그러진 보름달. 막막한 시간을 검푸른 와인과 출렁일 수 있었다
방문이 딸깍 닫힌 순간 방은 순식간에 검은 바다 위에 길을 잃은 배가 되었다 이렇게 빨리 어두워지다니,이렇게 급히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오다니,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나침반처럼 이곳의 위치를 떠올려줬다 먹먹했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우연히, 이토록 빠르게 밤바다에 잠길 줄은 몰랐으니까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 닿은 것처럼 창 너머 검은 밤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또 한 모금 와인의 흔들림이 내 몸속으로 푸른 바닷물처럼 스며들었지만 이 모든 것은 내일이 있기에 가능한 놀이였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도록 난 깨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취한 건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구조를 청하고도 싶었다
나를, 출렁이는 내 시간을 좀 가져가 줘!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의 익사를 알아줄 사람, 나의 변사체를 발견해줄 사람, 길이 끝나는 곳, 언덕 위 나라는 한 점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잡아먹는 검은 입이 되어 어둠을 향해 어슴프레 눈을 떴다 왜 나의 끝은 이런 이미지일까 그러니까 익숙하기도 했다 난 이곳에 이르면 늘 구해달라고 버둥거리곤 했다 정말 여기가 끝일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닷속 열수구를 떠올렸던가 순간 난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주 가벼웠고 내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환하고 따뜻한 에너지, 구름 그 무엇!
아, 아직 아니야, 난 저 아래 남아있는 젖은 나에게로 나를 돌려보냈다 너는 구름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0월호 발표
이병금 시인 / 꿈
내가 거울 한 장으로 내 풀잎의 생애를 비추어보는 날
푸른 물가 나뭇가지 위에서 저녁까치가 울고 있습니다
나즈막한 산 아래 김치찌개 보글보글 끓어나는 집이 있다고
그렇게 꿈이 피어나는 삶이 하나 있다고
이병금 시인 / 요강 하나 구해 들고
생일달을 넘기면서 할머니는 변소출입을 못하신다 이제 아흔네살 아득한 날들 일흔이 넘은 딸들이 각자 요일을 정해 놓고 집으로 가서 손발이 되어 할머니의 당번을 선다
내게도 요강을 하나 구해 들고 할머니가 더 아프기 전에 한번 보러 오라는 엄마의 지친 목소리 저편으로
나 또한 누군가의 손발이 되어 가는 요즈음, 지린내가 배어나는 방 안에서 시치스런 소망 하나 품어 본다
날마다 나 스스로를 살아가자고 나 혼자만이 손과 발로 걸어서 마지막 날에 축복처럼 당도하고 싶다고
이병금 시인 / 저녁 산사(山寺)
해 지는 서쪽으로 걸어나가니 벼랑 끝에 자그마한 절 한 채가 있더라
흰 촛대 위에 불꽃송이 너울너울 바람 속에 마지막 목욕을 이제 막 끝내고 있더라
저녁까치 끼르륵끼르륵 날아가며 쇠종소리 노을어둠 속에 잠겨들 때
하늘 아래 죽음처럼 따뜻하게 불 켜진 집 한 채가 밝아오고 있더라
이병금 시인 / 낙엽을 위한 파반느
세상이 잠시 황금빛으로 장엄하다 노란 은행잎들이 마지막 떠나가는 길 위에서 몸 버리는 저들 중에 어느 하나 생애에서 목마른 사랑을 이룬 자 있었을까 마침내 행복한 자가 그 누구였을까 최후까지 등불을 끄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만이 저 혼자 깊어간다 몸은 땅에 떨어져 나뒹굴지라도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남은 불꽃을 당기는 저들만의 그리움이 안타깝게 쌓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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