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 시인 / 인생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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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시인 / 인생
사데크 헤다야트¹의 글에 매력을 느낀 적은 없지만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눈먼 올빼미>²의 몇 문장은 외기도 하지요,
요즘 사과 깎는 연습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과 껍질을 벗기다 보면 처음엔 얇은데 나중에는 두툼해집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려 다시 깎지요 어제는 할인마트에 가서 과도를 샀습니다 날 선 것으로 골랐지요 섬뜩하게 사과 깎는 솜씨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과 먹으러 오세요 난 껍질을 먹겠습니다 오후에 문신을 하기로 했습니다 네 몸엔 나를 내 몸엔 너를 말하자면,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거지요 인간이 영혼 따위로 소통해야 한다면 내 살가죽을 벗겨 네 소리를 새긴 뒤 덮겠습니다 네 살가죽을 벗기지는 마세요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요 숨을 멈추면 소리가 들립니다 세월이 지나가는 소리 창밖으로 우주가 보입니다 목동자리며 천칭자리 전갈자리도 쌍둥이자리에서는 지구인으로 처음 교접을 했습니다 생명이 생기면 우주에서 태어나는 첫 번째 지구인이 될 겁니다 눈먼 올빼미를 읽어보라는 일전의 권유는 사양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문장 몇 구절은 외기도 하지요 방백과 침묵이 난무하는 거리의 그림자³처럼이거나 그림자의 미행에 쫓기는 환상에 시달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같은 구절입니다 쇼펜하우어에 취한 니체의 결말을 떠올리게 하는 생은…… 오늘 가글을 하다 목뼈에서 소리를 들었습니다 존재의 소리일까?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 미래에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분식이 뼈 건강에 좋지 않다는 조언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뼈에 관한 철학 따위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옛 전설 얘기가 듣고 싶습니다 기이하거나 엽기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요샌 개나 소나 다 엽기적이니까요 햇살이 정수리에서 이글거리는 한낮이기를 빌며……
1)¹ 이란의 소설가. 소설 <눈먼 올빼미>를 썼다. 첫 번째 자살에 실패한 뒤 두 번째 자살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 저주받은 소설이라고도 불리는 <눈먼 올빼미>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사유할 수 있는 고독과 소외에 대한 깊디깊은 고뇌가 담겨 있다. 1937년 출간 뒤 이란에서는 지금까지 금서다. 3)³ ‘그림자’는 사데크 헤다야트가 <눈먼 올빼미>에서 또 다른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5월호 발표
김민 시인 / 국도 겨울바람은 특히, 국도에서는 가공할 만하다. 건달 노릇을 하다 전봇대가 된 사내가 있다. 바람 때문에 곁눈질을 했는데 사시가 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바람은 국도에서 분다. 취한 오 톤 트럭은 국도에서는 세렝게티의 하이에나다. 겁에 질린 사내는, 샅으로 바람이 들고, 내장의 단물이 금계랍처럼 변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꿈에서 본 무늬만 궁전인 꿈의 궁전은, 시골 부동산업자의 손에 도매금으로 넘어갔는데 사내의 살을 비벼주던 그 살도 그날 국도로 나앉았다. 건달 노릇을 하다 전봇대가 된 사내는 소문이 파다하다. 산을 넘어 달아난 국도에 두런두런 소문이 자랐는데, 십일 월이었다.
남은 정액으로 시위를 하다가 불임 판정을 받고 돌아온 날, 처녀들의 수다가 국도에 거미줄처럼 걸렸다. 공사판으로 변한 국도에서, 건달 노릇을 하다 전봇대가 된 사내는 또 곁눈질을 했다. 일렬종대로 도열한 건달들의 손에는 곡괭이가 들려있고 내 집 하나 박살 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건 괜찮은데, 길을 잃은 게 문제였다.
김민 시인 / 악마에 대하여
물고기들이 기침을 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동틀 무렵이었다. 입술은 소문을 구걸했는데 소문이어서 괜찮았다. 부모들이 소녀들을 배웅할 때면 소년들이 훔쳐보더니, 소문대로 솟대가 구경한 셈 치면 되는 일이었다.
그제야 커서가 숲을 인쇄했는데 A4용지에는 식탁과 양푼이 그려졌다. 양푼에는 방울토마토와 으깬 감자가 담겨있었고 바닥은 주스 찌꺼기가 더께 져 있었다. 몽정을 배운 소녀들이 숲에서 발견한 거였다. 무덤 옆에서 바랭이가 웅웅 소리를 냈는데, 그 바람에 새벽안개가 산을 넘은 거라고 했다. 월식이 중늙은이의 등을 위로했으며, 폭포에서 멱을 감던 처녀가 사산했다는 소문은 거짓인지 몰랐다. 꽃들은 습기를 물고 해를 기다렸다. 새벽이 승천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이었다.
숲에서 멱을 감던 처녀들이 수태를 한 것도 어미들의 비명이 숲을 갈랐는데, 걸음을 멈춘 도마뱀이 그 소리를 들었다. 달 바라기를 하던 조선 남자는 도마뱀으로 식사를 하곤 큰 입으로 트림을 했다. 식탁이 비릿했다. 마루에는 묘비가 세워졌다. 새벽이었다.
숲으로 가는 소녀들의 행렬이 안개 속으로 보였다. 거리에서는 솟대들이 구경을 했다. 할멈이 집 앞에서 곡을 했는데 또한 새벽이었다. 나는 전령처럼 달려가 그 소식을 알렸다. 허기가 밀려왔다. 아침 식사로 하얀 국수를 해 먹었다. 내 목숨이 질겨졌다.
김민 시인 / 깃발
몽상 뒤였다. 밤사이 섞인 몸에선 뼈가 맞춰지고 살집이 되살아났다. 창가에서 본 거리는 텅 비어 알몸이었다. 하루를 산 폐는 호흡을 거부하더니 명상을 시작했다. 눈 쌓인 거리는 태초와 흡사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거리로 퍼져 나갔다. 전진하는 동안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토막잠은 긴 의자를 연상시켰다. 폭설이 멈추자 구름 사이로 해가 보였다. 배고픈 참새들은 향나무 잎을 쪼아 먹었다. 참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골목에는 깃대가 가득했고 의미는 사라지고 형체만 기억했다.
해가 드는 숲에서 남몰래 깃발을 만들었는데 깃발은 익명으로 나부꼈다. 깃발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람들은 가슴을 가린 채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의 생애가 편년체로 기록됐다. 나는 거리로 달려 나갔다. 커피를 마시며 깃발을 복종시켰는데, 그만하면 몽상의 대가로는 충분했다.
김민 시인 / 목구멍 깊숙이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목구멍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목구멍은 생각을 하는 곳이 아니라 처넣는 곳이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애달픈 목구멍, 이라고 말했다. 목구멍은 그렇게 매일 뭔가를 처넣었는데,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목구멍은 무엇이든 기억하는 법이 없었다. 흑미가 섞인 밥알과 프라이팬에 구운 스팸을 처넣는 동안 목구멍의 일상이 잠시 슬퍼졌을 뿐. 귓구멍을 막고 가만히 하늘을 보면서 나는, 구멍에 대한 여러 기억을 추억했다. 시간이 새털구름처럼 떠도는 동안, 나는 결코 우연히 살아남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것이었다.
김민 시인 / 가구를 위한 라이브
나는 한때 가구였다. 거실은 하품이 용인되지 않는다. 책장 속의 허무주의와 자유주의는 나와 무관하다. 묵언과 칼처럼 파고드는 침묵을 우울하게 실감할 뿐, 내 집은 나를 가두고 책장은 나를 세뇌하는데, 내 사전에 저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가구처럼 트림을 하며, 트림은 내가 할 수 있는 존재의 무기력한 확인일 뿐 그것이 나를, 다시 거리로 내몰 것이다. 그때 너는 의심하지 말기를, 머지않아 거리에서 불타는 가구를 목격하게 될 터이니. 내가 나를 태워 재생되는 생생한 현장을 나는 라이브로 들려줄 테다. 다시는 개처럼 짖지 못하도록 다시는 소처럼 하품하지 않는 역사를 디자인할 것이다. 나의 카메라가 들려주는 라이브는 쇼가 아니다. 익명의 거리에서, 불타는 가구의 현장을 라이브로 송신하는 동안, 너는 소파에 누워 비로소 너의 눈을 의심하게 될 테니. 그제야 나는 너를 비웃으며 너를 폐기처분할 것이다. ㅡ2016년 《현대시학》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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