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옥 시인 / 말과 말 사이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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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옥 시인 / 말과 말 사이 내 안에 말의 마을이 있다 때론 폭설이 내리기도 하고 때론 폭우가 쏟아지는 큰 마을 착한 말과 사나운 말은 같은 주민이다 내 안에 살고 있던 말들 내 의지와는 다르게 튀어 나온다 정작 철퇴를 휘둘러야 할 말은 온순하게 고삐에 묶여 딴청이다 수만 가지의 말들이 엉켜 있다 봄꽃들을 피워내다가 느닷없이 뛰쳐나간다 어제 내가 한 말 말밥굽 소리 요란한 말처럼 입 속에서 입 밖으로 달려나갔다 말 한마디를 건네받아 곱씹어 보면 말과 말 사이에 시간이 있다 그렇다면 생의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그 말을 기다린다
전명옥 시인 / 배꽃
배꽃의 향기는 바람에 흩날리고
이화의 눈물꽃은 어디에 뿌려지나
갈곳 잃은 여류시인은 오늘도 꽃술에 취하는구나
전명옥 시인 / 바람의 창작 노트
바람에 관해서라면 나뭇가지들의 물만큼 전문가도 없지 조금씩 바람만 불어도 모자를 고쳐 쓰고는 아는 체를 하지 별들의 순서를 정렬시키고 빛나도록 닦고 별자리를 만든 장본인들이 자신들이라고 우기기도 하지
춘삼월 서설 내리는 날 산수유들 노랑을 불러낸 일도 자신들의 일이라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지 모란 꽃나무 줄기 끝 자색 잎 청상의 치맛자락에 옮겨 앉아 있다가 베개 모서리까지 간다고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낮은 말로 일러주지
시골 장날 한 모퉁이 팔순 할머니 대소쿠리에 담긴 냉이와 쑥 산토끼 발자국을 닮은 것도 다 자신들이 불러낸 쌉쌀한 입맛들이라고 하고 낮은 지붕들 들썩이며 세상에 없는 짐승의 소리를 흉내 내는 일 그것도 자신들의 장난기라고 하지
씨앗을 눈뜨게 하고 쌍떡잎 피워 올리는 일 자기가 집필한 손바닥만 한 파지들 스스로 떨궈 거두어 가는 바람의 공책이지
-시집 『가끔 실패하는 미래』에서
전명옥 시인 / 칠 남매 가족사진
많은 분들은 왜 한자리에 모여 웃으며 사진 찍었나요 칠남매 부부와 그분들 자녀들이 칠순 잔치에 모였단다
총 마흔일곱 분 한 부부가 칠 남매를 낳았다니요
참으로 이상한 일이에요
몇 년 전 일이에요 어느 나라 사람들 사진이에요
우리나라 오십 년 전 사진이란다 그때는 한 부모가 육남매, 칠남매 출산하는 건 흔한 일이었단다 팔 남매 이상 출산하는 부부도 있었단다
저 사진 속 칠 남매들이 혼인하여 몇 명씩 출산했는가요 한 세대 내려가니 한 부부가 네 남매, 삼 남매 출산했단다
저의 외삼촌 댁은 남매를, 저희 부모는 저만 낳으셨어요 그러니까 한 오십 년 지나니 이젠 한 부모 아래 아이를 둘 출산하면 다자녀 가정이래요. 몇 십년 지나면 삼촌, 사촌, 고모님, 이모님도 없겠네요 저희 반에는 한 부모 아래 한 명뿐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에요 수십 년 전부터 띄엄띄엄 유치원, 초,중,고, 대학들이 폐교한다고들 하던데요 요즘은 폐교 자체가 뉴스거리도 못 되지만 한 교실 안에 학생 수도 열 명 정도래요. 이러다가 한 오십 년 지나면 우리나라 어찌 되나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존재할까요
멸종의 종류에는 동식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을을 얽어매던 촌수들과 한 가계를 이루던 온갖 호칭들 없어질 것들이 바람처럼 휭 지나가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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