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 시인 / 오, 자귀꽃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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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시인 / 오, 자귀꽃
살살 녹을거라, 달달할 거라 생각한다면 혀끝 먼저 대봐 촉촉 젖어드는 네 가슴 발랑발랑 심장 터질지 몰라 옥수수 수염 될지도 몰라 반반한 햇살이 전부인 몸 오락가락 치근대는 빗줄기야 너무 쉽다고는 마 함부로 눕는다고는 마 보드라운 숨결에 네 목이 베일지도 몰라 애간장을 쥐고 천천히 핥을 지도 몰라 한 사람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솜사탕처럼 녹아내린 담장과 어머니와 처녀의 경계 달달한 인생을 팽팽 도는 붉음을 -준비하시고 쏘세요 징그럽게도 달아오른 네 눈에 착 달라붙는 혀, 밤마다 푸른 비늘을 오므려 갈은 칼이지 몰랐지? 꽃이 아니라 뱀이라는 오, 작위 작위꽃
-시집 「오, 작위 작위꽃』 에서
정온 시인 / 가는귀 한나절 내내 구름을 키우시는 당신, 축축한 감정을 키우는 나는 발랄한 구름의 말을 읽네 생각을 넓게 펴면 구름 몇 개는 뭉뚱그려 쌀 수도 있구나 눈에 든 어둠을 어떤 이는 구멍이라고 하고 다른 이는 겨울이라고 했네 귀 어두운 사람과 귀 밝은 사람 중에 누가 연할까 마침맞게 도는 식욕처럼 비가 오고 겨울은 조금 멀리 있고 나는 겨올비를 좋아하지 칼칼한 김치칼국수를 훌훌 불며 먹는, 목덜미에 도르르 땀이 흐르고 연신 닦으며 바지런히 넘기는 소리 창밖 빗소리를 맛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게 이리 좋은가 천천히 흔들리며 가는 지구와 저편의 달과 떠도는 바람의 그렁그렁한 말 나는 내 먹먹한 구멍 속으로 걸어 들어가 길을 잃었다
정온 시인 / 이상한 나라에 온
키우지 뭐든 앵무새금화조앙고라공작개구리병아리오골계장미봄이고여름이고장미, 빠알간 장미 옆에 하얀 몰티즈
여인네들은 일한다 끊임없이 일한다 악착같이 일한다 빨간 동화를 사기 위해 늘 바쁘고 늘 말을 끊고 잠도 안 자지
금요일이네 저녁이네 갖은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에 장미 꽃잎 갈아 넣고 식탁을 차리지 어때? 불타는 저녁이구먼 세상을 돌아 식탁에 온 그가 머리의 물기를 털며 만족한 웃음을 짓는데
온다 드디어 온다 먹으며 눈짓 발짓 개처럼닭처럼토끼처럼앵무새처럼햄스터처럼열대어처럼 오물거리다 씹으며 짖으며 꼬리를 친다
휴일 아침이 오른쪽 창 앞에 느지막이 배달되고 새로 산 개에게 아침을 준다 새 옷으로 갈아입힌다 야외로 산책을 나간다 어때 좋지? 자 달려 달려봐, 맘껏 달리라구
48시간 빨간 동화가 끝나고
정온 시인 / 난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는 무릇 벌레가 산다 돛을 세운 바람 타고 구만리장천 깃을 치며 멀리 날아가 번식하기에 바쁜 벌레들
난감하다
끝이라고 섰는데 계단이었다 오래 접어둔 아코디언을 펼치듯 먼지 풀썩이는 계단을 밟고 서서 끝이라고 믿은 것이다 북받치는 제 자신을 눌러 한 음절 다시 한 음절 오르며 울면 울음은 바람을 타고 가 잠든 벌레를 깨우고 창을 연 벌레가 난간 붙잡고 밤새도록 같이 우는 것이다
주먹을 쥐며 오늘은 꼭 떠나려는 자의 명치끝에 강가 풀숲에 낭자한 풀벌레 소리 내려앉는다 목 놓아 불렀을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그러쥐었던 손목들이 매달려 바람에 운다 댕강댕강 울고 있는 다리의 난간 검푸른 물의 밖을 서성이다 강바닥에 떨어진 세상 끝을 주우러 누군가는 힘을 놓았을 것이다 딸깍,문이 열리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빛에 눈은 멀고 아아아,
끝에 다다라야 얻는 환한 깨달음이라니 어차피 어둠이라니 난감하다
정온 시인 / 싹이 파랗다
그 작고 여린 두 잎에서 어떤 징조를 읽어내다니 대단하시다
만데빌라 가느다란 덩굴손에 싹이 돋았네 꽃이 될까, 아니면 잎이 될까
식구들은 입을 조그맣게 벌려야했다 금붕어처럼 맹물을 마셔야했다 점점 뿌리가 썩어간다는 말을 들었다 더 자라지 못할 거라는 슬픔이 머리끝에서 쏟아졌다
그러니까 그 대단한 지혜와 슬기가 나를 읽었고 이후 쳐다보지 않은 것이다
기어이 결연히 이 악물어 시들어가는 줄도 나는 몰라 -아니야 잎이 아니라고! 푸른 이파리들 자꾸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시든 가지 끝에 각혈 같은 꽃 한 송이 매달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은 다르다는 그 말을 오래도록 씹어본다
정온 시인 / 내가 문인 줄도 모르고
열면 난간 그 너머 하늘 구름이 있고 구름 뒤로 일억오천만 킬로 떨어진 태양 빛이 시원하게 뿌려지는 숲, 아카시아 향이 두 팔을 들고 걸어 나오는 숲
크면 얼마나 크겠어요 지구 위에 열기구들, 알록달록 귀엽죠?
크면 얼마나 크겠어요 우리 은하 속에 지구별,
그래요 크면 얼마나 크겠어요 당신과 나의 생각이, 기억과 시간이
거문육눈이유령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글을 뽑아내어 종이 속에 가두는 일
열고닫고 열고 닫으며 서랍만 하게 옥상만 하게 얼마나 크겠어요
안이라고 믿은 것들 바깥으로 걸어 나갑니다 뭐라 부르면 돌아볼까요
빛과 어둠, 사랑과 분노, 무서움과 가벼움, 이분법으로 나뉜 모든 것들에게 열어주고 닫아주는 게 나의 몫인걸
어둠을 키우고 무서움을 키우고 분노를 키워요 얼마나 크겠어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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