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준 시인 / 갇힌 말들이 폭포처럼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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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준 시인 / 갇힌 말들이 폭포처럼
책장이 댐 같다
한 권의 책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되었을까 바람이 전하는 말과 사막을 건 너는 낙타의 말 무수한 별들의 대화와 어시장에서 활보하는 비린 말들 정치꾼의 말 그 여자의 말 그 남자의 말
책장에 방류되는 책을 잡으면 책 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가지런히 꽂힌 댐 앞에서 가장 안락한 마음으로 고뇌하는 나는 오늘도 물을 채우 려고 밤새도록 수백 미터 지하에 관정을 판다
오늘따라 소용돌이치는 책장 나의 방류를 막아두기 위해 쌓아 둔 댐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에서
박봉준 시인 / 새들의 죽음에 관한 보고
빌딩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새가 싸늘하게 누워 있다
눈물의 지문은 찾을 수 없었다 행인들은 빌딩의 투명 유리창을 인지하지 못한 새의 불운이라고 혀를 차며 지나갔다
하늘을 나는 것들도 이제 신기루를 경계해야 할 때가 왔다
죽은 새는 한 마리 죽은 새일 뿐 그가 죽은 공중에서 다시 날개를 펴고 비행하는 새들의 생각도 신기루일까
사람들은 새의 죽음을 동정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공중은 비행하는 것들의 영역이었다
투명 유리를 구별하는 새의 진화와 새의 충돌을 방지하는 알량한 선심이 난무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툭 툭 떨어지는 동백꽃 같은 억울한 주검들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박봉준 시인 / 어쩌나 생전에 콜레라에 놀란 적 있는 저승에 계신 우리 아버지 코로나19는 또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고 기겁하실라 세 살배기 손자 초등학교에 들어가 아침마다 마스크 안 쓰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징징거리면 어쩌나, 맞선 보고 첫날밤 마스크를 벗은 서로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다시 상투를 틀고 갓 쓰고 무슬림 여자들처럼 니캅이나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나 어쩌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호랑이보다 곶감이 무섭고 곶감보다 콜레라가 무서운 줄 알았는데 핵무기보다 무서운 코로나, 코로나19를 물리치고 나면 또, 어쩌나* 문밖에 나가지 마라 대문을 잠그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던 사람들 이번 전쟁은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 출애굽기 11장
박봉준 시인 /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산목숨을 쥐고 글을 쓰는 것이 시인이 할 짓인지
닭 똥구녁을 쳐다보고 산 지 수십 년 명색이 시인이라는 자가 닭에 대한 글 한 편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물으면 나는 무슨 변명을 하고 싶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둬놓고 깃털 뽑을 날만을 기다리는 홀로코스트 영혼까지 사육당하는 짧은 생을 위해 나는 단 한 번이라도 고개 숙인 적이 있는지
철마다 오는 조류독감에 수백만 목숨을 순장하여 죽음을 죽음으로 막겠다는 호모 사피엔스 게놈에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비밀문서가 아직도 해제되지 못하고
기름 가마솥에 던져지는 순간 부화실에서부터 따라붙었던 짧은 이력은 증발하고 윤기 흐르는 통닭 한 마리로 환생하는 병아리들 그들은 처음부터 계획된 먹거리였다
누구를 위한, 수십 년 침묵의 변명이 될지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 2022. 상상인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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