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시인 / 별이 빛나는 밤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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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시인 / 별이 빛나는 밤
종로2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황지우 시선집을 이천구백원에 샀다. 횡재다. 아주 싼 커피값에 시에 눈뜨게 해준 정수, 여전히 이 시대의 불행과 비극의 골목길을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이 뛰어난 시집을 이천구백원에 사다니. 종로점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은 자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애(愛)시인들은 모두 언제나 그리운 나그네들 같아 어느 날 문득, 다시 찾아오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다. 온 밤이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변한다. 수만 수천 사람들이 반짝반짝 눈을 뜨고 시를 밝히는, 별이 빛나는 밤!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
김상미 시인 / 반성
깊이 깊이 후회해 너를 사랑했던 것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너에게 내 시를 보여주었던 것 너랑 영화관에 갔던 것 너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사주었던 것 네 품에서 알몸이 되었던 것 아무렇게나 던져진 텅 빈 우주에 너를 초대했던 것 너와 함께 비엔나의 숲속에서 치즈버거를 먹었던 것 너에게 가장 친한 내 친구를 소개했던 것 너 때문에 비 내리는 센강에서 울었던 것 너 때문에 불같이 타오르는 꽃잎 하나가 내게로 떨어졌던 것 너의 모든 말이 거짓인 줄 알면서도 환하게 웃었던 것 네가 한 모든 약속을 모래로 가득채워 흘려버렸던 것 너를 떠나보내기 위해 나보코프를 읽으며 모나코 나비를 찾아 헤맸던 것 그러고도 네 꿈을 자주 꾸었던 것 그러고도 너와 함께 잘 먹던 꼬투리 완두콩을 아직도 좋아하는 것 그러고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는 나 그 모든 것을 후회해 깊이 깊이 후회해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
김상미 시인 / 에릭 사티를 들으며
누군가가 그리울 때면 예쁜 찻잔에 김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부어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고 햇빛 속에서 김이 무지개색으로 춤추는 걸 바라보아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뜨겁게 수많은 팔레트 앞에서 처연히 춤추는 수잔 발라동을 바라보며 에릭 사티도 그런 눈으로 <짐노페디>를 작곡했을 거예요 수잔 발라동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 괴팍했지만 마음은 항상 따뜻했던 남자 그가 치는 피아노 건반엔 언제나 비가 내려 늘 우산을 지니고 다닌 남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던 그의 옥탑방에 나란히 걸려 있던 그림 두 점 수잔 발라동이 그린 에릭 사티와 에릭 사티가 그린 수잔 발라동 언제나 똑같은 흰색 음식과 똑같은 검은 정장과 모자, 똑같은 손수건과 우산, 똑같은 사람만을 좋아했던 남자 한결같은 그 마음으로 작곡한 챙 없는 흰 모자 같은 그의 피아노곡이 햇빛 속에서 무지개색으로 춤추며 증발하는 걸 바라보며 오늘은, 오늘만은 나도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를 불러내 그를 듣고 또 들어요 이 멜로디 또한 간절히 내게 다가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간절히 나를 떠나가겠지만 햇볕 잘 드는 창이 아직 내게 있는 한 언제든 그리운 사람은 늘 그리운 사람 햇빛만 비친다면 햇빛 속에서 하염없이 함께 춤추고 싶어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뜨겁게 에릭 사티를 들으며
김상미 시인 / 비밀
애인을 가슴에서 꺼내 벽에 걸어두니 참으로 조용하다. 벽에 걸린 벽의 침묵이 세속과 다른 냄새를 애인에게 발 산하여 애인은 지금 한창 침묵중이다.
침묵이란 본래 심장 가까이 두는 물건이라 맛만 들이면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깊은 맛을 발산한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침묵 속에 침전해 있던 애인이 어 느날 덜컹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불과 얼음의 우화 따위 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방안은 금세 격동으로 치닫는다. 저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침묵의 해류에 휘감겨 십자 가에 매달리듯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마치 그 속에서 정화되어 다시 솟는 분출만이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듯!
제4회 「박인환 문학상」수상작품집 '자선시'중에서
김상미 시인 / 그 집
언제나 그 집이 그립습니다 대청마루 한켠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내리시던 아버지 토닥토닥 싸우면서도 동생과 함께 듣던 모차르트,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 김민기의 노래가 뭐든지 숨길 수 있고 그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타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던 집이, 집 안의 집, 우리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습니다 동그랗게 깎인 사과의 심장을 맛보았습니다 불가사의한 가족의 현, 그 나긋나긋한 갈등들을 호흡했습니다 평탄하진 않았지만 사방으로 난 창문 밖으론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마당 한 모퉁이 깊은 우물 속 짙푸른 이끼 냄새가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냄새만으로도 세월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지붕 아래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포클레인의 방문과 함께 시작된 생체해부 이후 그 집은 도로가 되어버렸습니다 크고 작은 차들로 흩뿌려진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애는 존재하지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추억이, 음악이, 환희의 정령들이, 짙푸른 숨소리가 한없이 배어 있던 벽돌들은 다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집의 내력 또한 거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더이상 그 집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집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집 안의 집, 우리 집은 형이상학 속으로 잠겨버렸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발굴되지 못한 황금의 사닥다리 그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건 햇빛뿐입니다 바람뿐입니다 기억뿐입니다 가까스로 타오르는 옛정뿐입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그 집의 활기, 그 집의 유리창, 그 집의 우물, 그 집의 흙, 그 집의 채송화, 그 집의 가족들이 다 그립습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잠을 설쳤다던 옛 켈트족처럼 내 삶에서 그 집이 무너져 내릴까 겁이 납니다 하여 나는 아직도 그 집에 빗장을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집의 영화처럼 초목을 삼키고, 보도를 삼키고, 시간을 삼키고, 슬픔을 삼키고, 체취를 삼키고, 사람들의 뜨거운 한숨을 삼켜 어찔어찔한 옛 향기로 천천히 심연으로, 심연으로 기울어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집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끝에 있었습니다 그 집이 그립습니다 눈물겹게 그립습니다
김상미 시인 / 엔젤피시
내 머리 속 수족관에 엔젤피시 한 마리 살고 있어요 엔젤피시는 내 소녀 때 이름
물결치는 분홍 줄무늬가 너무나 예뻐 어느 날 생물 선생님이 한입에 꿀꺽 삼켜버려 죽어버린 소녀
남몰래 울다 미술시간에 발견한 뭉크의 '사춘기' 엔젤피시를 닮은 너무나도 작고 창백한 소녀 나는 얼른 그 소녀를 내 머리 속 수족관에 넣어버렸지요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이젠 내가 너를 지켜줄게
엔젤피시는 이제 내 머리 속 수족관에 살아요 분홍 줄무늬 지느러미를 팔랑, 팔랑거리며 이 세상에 없는 더 넓고 광활한 내 머리 속 꿈들을 먹고 살아요
가끔씩 내가 눈을 꼭 감고 입을 꼭 다무는 건 내 머리 속 엔젤피시의 부드러운 애무에 내 온몸이 너무나 나른해졌기 때문 아침이슬보다 더 영롱한 엔젤피시의 노래에 내 온 마음이 너무나 청명해졌기 때문
그러니 이제는 누구도 내 소녀를 삼키지 말아요 소녀는 소녀끼리 서로서로 아껴주며 어른이 되어야 해요 꿈꾸는 어른
설혹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된다 해도 힘차게 분홍 줄무늬 지느러미를 팔랑, 팔랑거리며
김상미 시인 / 내 안의 오필리아
운향꽃을 입에 물고 강으로 뛰어드는 오필리아 운향꽃은 임신중절용이라는데
태어나도 활짝 피지 못할 사랑을 품에 안고 내 안의 오필리아, 너는 어디로 가니?
죽어가는 두개골 속 꼬인 내장과 순진한 뼈 속에 존재하는 어둠 그 어둠 하나하나가 네가 두고 간 식탁 위에 꽂힌 로즈메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데
(이젠 제발 나를 잊어줘요 우린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어요 한번 잘못 낀 단추는 뒤바뀐 운명과 상관없이 다시 끼워야 해요
그러나 다시 낀 단추는 그만큼 이미 서로를 낭비한 시간 어느새 노을이 어둠을 부르는 시간
그러니 이제는 제발 나를 잊어줘요 밝고 온순했던 내 비둘기들을 모두 다 날려 보내줘요
세상에서 가장 서글픈 남자는 임신한 여자를 강물에 뛰어들게 하는 남자)
하루 종일 제 이야기로만 엮은 사랑의 화환을 짓이기며 오필리아, 너는 차디찬 회한보다 더 창백한 시간을 베어 넘어진 나무처럼 모두 강물에 띄워 보내네
무성한 소문에 입맞춤하고도 끼리끼리 모여 있는 이들에게 새하얀 목을 드러낸 채 그 부끄러운 핏빛 산고를 혼자 치르며
죽어서도 활짝 피지 못할 사랑을 품에 안고 아름다운 오필리아, 너는 어디로 가니?
(누가 그녀를 좀 말려줘요 내 안에서 울고 있는 오필리아 그녀에게 누가 내 삶을 좀 나눠줘요
그녀가 얼굴을 파묻은 강물에서 일어나 나와 함께 동쪽으로 동쪽으로 새로운 지비을 찾아갈 수 있도록
누가 그녀에게 내 삶을 좀 나눠줘요 죽은 고기를 먹고 사는 새카만 새들이 강둑을 넘기 전에 내 안의 오필리아, 착하디착한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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