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노해 시인 / 두 가지만 주소서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08:00
박노해 시인 / 두 가지만 주소서

박노해 시인 / 두 가지만 주소서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박노해 시인 / 나는 그냥

 

 

나는 그냥

인정받고 살고 싶다

유명하지 않아도

남들만큼 빛나기를 원한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

남부럽지 않게

남들 사는 만큼 살고 싶다

 

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

너만큼은 부자가 되고

네가 잘나가면 나는

너 정도는 잘나가고

내가 못 따라잡으면

나는 내 아이를 기어코

네 아이만큼은 밀어 올리고

 

나는 그냥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걱정 없이

어려움 없을 정도의 적은 재산으로

죽을 때까지 풍족하게 살고 싶다

 

나는 그냥

지금 뭔 말하는지 나도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들 하니까

뭔 소린지 몰라도 지금 나는 그냥

 

 


 

 

박노해 시인 / 천 년의 시작은 이렇게

 

 

나무가 잘려나가고 좋은 땅을 빼앗겨도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황무지를 일구며

다시 어린 올리브나무를 심어나간다.

척박한 땅에서 올리브나무 하나 키우기란

아이를 기르듯 공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모래바람과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 그루 한 그루 낡은 드럼통으로 감싸고

그 위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상징하는

초록, 하양, 빨강색을 기원하듯 칠해두었다.

이 작고 여린 나무들 중에 끝내 살아남아

다시 천 년을 이어갈 올리브나무가 있으리니

그토록 길고 큰 '사랑의 나무'의 시작은

얼마나 미약하고 눈물겨운지

 

 


 

 

박노해 시인 / 도토리 두 알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박노해 시인 / 바람이 바뀌었다

 

 

천둥번개가 한 번 치고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바람이 바뀌었다

 

풀벌레 소리가 가늘어지고

새의 노래가 한 옥타브 높아지고

짙푸르던 나뭇잎도 엷어지고

바위 틈의 돌단풍이 붉어지고

 

다랑논의 벼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검붉게 익어오고

산국화가 꽃망울을 올리고

하늘 구름이 투명해지고

 

입추가 오는 아침 길에서

가늘어진 눈빛으로 먼 그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무더운 열기와 무거운 공기와

얼굴을 가리고 말들을 삼키고

마스크 씌워져 무감하고 무디어진

내 생의 날들이여

 

이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맑아지고 섬세해진 나의 감각으로

거짓과 진실을

강제와 자율을

예리하게 식별해 가야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바뀌었다

하늘이 높아졌다

 

 


 

 

박노해 시인 /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박노해 시인 /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박노해 시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본명: 박기평). 16세 때 상경, 낮에는 노동자로 생활하고 밤에 선린상고(야간)를 다님. 1984년 스물일곱 나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 1989년, 분단 이후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을 결성.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1991년 체포,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짐. 옥중에서 1993년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과 1997년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출간. 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