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양 시인 / 들 건너 불빛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08:00
정양 시인 / 들 건너 불빛

정양 시인 / 들 건너 불빛

 

 

밤 깊은 들판은

지척인지 천리인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지척이 천리인 내 사랑은

헤아리기가 더 어렵습니다

 

지척에도 천리에도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창밖을 자주 내다봅니다

천리 밖에도 진눈깨비인가요

쌓이지도 못하는 진눈깨비만

오다 말다 방안을 기웃거립니다

 

하나둘씩 꺼지고 아직도 남은

들 건너 마을 불빛 두어 개

지척도 천리도 한꺼번에 사무칠

눈보라가 그리운 불빛 두어 개

지척인 듯 천리인 듯

밤새 깜박이는 들 건너 불빛

 

 


 

 

정양 시인 / 벚꽃길

 

 

알부민이나 로얄제리 같은

귀한 것들은

아무데나 내둘리면 금방

상해버린다고, 꽁꽁 냉동보관이나 해야

가까스로 견뎌낸다고,

사람 사랑하는 일도 그와 같다고,

눈감고 입다물고 겨우내

묵은 벚나무들 줄지어 서 있던 길

보고 싶은 옷깃이나 꽁꽁 여미며

나는 그 길을 지나다녔네

 

그 길 그 하늘에

저 숨막히는 눈부신 꽃잎들 보아,

무슨 독한 맘먹고

볼 테면 보라고

못 견디어 휘날리는가

 

다 들켜도 짓밟혀도 좋다고

벚꽃은 저렇게

휘날리려고 피는가보다

 

 


 

 

정양 시인 / 지척인지 천리인지

 

 

소식 끊어진

천리가 안타깝던가

만날 길 없는

지척이 더 적막하던가

 

지척이 천리인

저 눈발 보아라

천리보다 지척보다

더 사무치는 눈발

 

정처없는 꿈이 삭아서

지척이란 저렇게도

아득하구나

 

눈 부비며 바라보아도

지척인지 천리인지

눈이 흐리다.

 

 


 

 

정양 시인 / 빈 무덤

 

 

형무소에 끌려가서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육이오를 맞았고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냈다는

그럴듯한 풍문도 아랑곳없이

인공 난리 다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안 돌아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던 점쟁이 아줌마는

마을을 온통 사람범벅으로 만들어 놓고

돌아온다고 못박고 그 날짜에 으시딱딱

종적을 감추기도 했었습니다

 

휴전선이 생기던 해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다가

몸져눕기 한 해 전에

팔아먹다 남은 산자락에

빈 무덤 하나 지었습니다.

사람 죽으면 어채피 흙 되드라

넋은 넋대로 떠돌드라도

떠돌다가 필경은 담길 디가 있어야지

 

탄광파업철도파업대구폭동여순반란

아직도 그런 일로 떠돌지 싶은

떼죽음 따라 난리를 따라 풍문을 따라

떼죽음의 산기슭 검붉은 속살을 헤집어

백지에 삼베에 명주베에

겹겹이 퍼담은 지리산 흙

살 대신 뼈 대신 어루만지며

넋받이로 깊이 파묻은 지리산 흙

 

전라도땅 김제군 공덕면 마현리

산 십구번지 야산 자락에

잡초 무성한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정양 시인 / 없어도 그만인 것을

 

 

집만 덜렁 지어놓고

서둘러 이삿짐을 옮겼다

 

대문이며 울타리며

이 집에는 아직

그런 것들이 없다

앞산이 뒷산이 첩첩해도

그런 것들 없는 것이

맘에 걸린다

 

없어도 그만인 것을

있어도 소용없는 것을

있어서 더 성가신 것을

 

어쩌자고 또 그것들이

자꾸만 맘에 걸린다

 

 


 

 

정양 시인 / 이슬

 

 

생전의 슬픔이 저렇게

이슬로 맺힌다던가

원한도 미움도 그리움도

저렇게 이슬로 내린다던가

 

밤길에 채이는 이슬을

이슬털이 씸김굿 삼고

젖은 바지 걷으며 바라보는

눈부시는 풀밭의 아침

 

우리네 슬픔이 저렇게 반짝일 수 있다면

미움이 그리움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답다면

 

부대끼며 남은 것들이

못 견디게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맘놓이리리

 

 


 

 

정양 시인 / 진달래 캐러 왔다가

 

 

뜰에 옮기려고

진달래 캐러 산에 왔다가

진달래꽃 흐드러진 산자락

삽자루에 기대어 넋놓고

꽃구경만 한다

 

마음 다 비운 듯이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래도 꽃들이 심상치 않다

화장끼도 화냥끼도 없이

그냥 바람난

바람난 게 무언 줄도 모르고

그냥 바람난

아슬아슬한 여자애들만 같다

 

누가 진실로 마음 비우고

하염없이 바라본다면

그 곁에 다가와 비로소

맘놓고 곱게 필 진달래꽃

 

꽂았던 삽 뽑아들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돌아갈거나

그냥 돌아가고픈 속을

환히 알고 있는지

어디 한번 일 저질러보라고

깔깔거리는 산자락마다

흐드러지는 진달래꽃

 

 


 

정양 시인

1942년, 전북 김제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천정을 보며」 당선. 197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동심의 신화」 당선. 시집 『까마귀 떼』 『수수깡을 씹으며』 『빈집의 꿈』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눈 내리는 마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제9회 모악문학상, 제1회 아름다운작가상 수상,  2005 제7회 백석문학상. 2016.11 제8회 구상문학상, 현재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우석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