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 시인 / 어린 시인의 죽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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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시인 / 어린 시인의 죽음
물비린내를 싫어한다는 어린시인 어서 밤을 불러내 어두운 커튼으로 강과 바다를 덮어주마
아픈데도 없고 사랑의 패배도 아닐텐데 그리도 빨리 젊음을 버렸는지
저녁놀 같은 생의 앞에서 느껴짐은 같지 않겠지만 사유가 무엇인지
첫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된 미래의 손을 갖고서 신이 때리지 않고 물비린내 안나는 곳으로 잘가렴.
* 차도하 시인(1999~2023)의 첫시집이자 유고시집인 "미래의 손"을 읽고 ...
김중일 시인 / 다녀가다
차갑다 옆자리가. 아스파라거스 새파란. 누가 다녀갔다 재채기처럼 순식간에 분명히. 왔다 일 년을 걷고 다시 그 절반을 걸어서. 앉았다 갔다 창 문을 내다본 사이. 이제 같이 살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죽은 지 일 년 반 동안 묻고 물어 걷고 걸어. 몰래 다녀갔다 죽기 살기로 찾아와 놓고. 한 번 떼써 보지도 않고, 이제 같이 살지 않겠냐며. 높이 저 높이 던져 올린 토마토가 떨어져 막 정오를 무심히 지나치는 시곗바늘에 꽂혔다. 자전거에 앉아 고개 드니.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온다. 방금 전 일어난 안장의 체온이 천천히 식어가는 속도로 분침에 말끔히 잘린 하루해의 절반이. 그 사이 다녀갔다 누가 감쪽같이. 빈 밥상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주인 없는 생일날. 밥상 아래로 갔다 식은 미역국이 얼음처럼 얼도록. 내 무릎에 앉 았던 아주 작은 아이가 아이가 타고 온 공기가. 땅 위에서 죽듯 새가 결국. 구름 속에 묻히듯 나무가 마지막에. 그냥 가지 않았다. 스쳐가듯 다녀 갔다. 나보다 조금 먼저 갔다 작년에. 일교차 사이로 다녀갔다. 고인의 방 안팎의 밤낮 사이로. 무심결에 고개 돌리다가 마주쳤다 아스파라거스 새파란 행운목 한 토막에 걸터앉은 꽃. 번번이 몰래 다녀가려던 꽃 을 만났다 꽃의 실수로. 기왕 만난 거 꽃피듯 잠깐씩 영원히 같이 살지 않겠냐는 물음, 내 기억 속에서만 헤아릴 수 없던 꽃이 눈앞에서. 마음만이 몇십년쯤 앞선다. 여기 없는 몸보다.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에서
김중일 시인 / 저녁으로의 산책
저물 무렵 출입문을 열자, 막무가내로 길이 그의 몸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딛는다 길은 긴 숨을 내쉬며 어슬렁거린다 뒤꿈치로 바닥을 꾹꾹 밟아보더니, 한 발 한 발 걷는 종아리에 이내 바람이 탱탱하게 들어찬다 순식간에 붉은 차압표가 붙는다 그는 압류된다
공단과 아파트 사이 개나리담장, 잘린 자리에 한 남자가 고무호수로 물을 뿌리고 있다 꽃씨가, 환하게 부서진다 그 환한 언저리에서 붉은 빛 톡톡 터뜨리며, 오래 전 헤어진 여자가 그에게로 걸어 들어온다 밀면 삽짝처럼 힘없이 비켜서던 여자 그를 사랑한다는 한 여자… 문설주와 열린 문 사이, 벌어진 틈처럼 음탕하다 싶어 돌려보낸, 그 길이 그의 몸 속으로 다시 들어와 눕는다
그가 문을 닫자, 길이 신음하며 잘린다 지금은 그의 몸 속에서 공중누각이 부풀어오르는 시간 미처 들어오지 못한 몇 갈래의 길이 그의 마음속 切開地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방패연 같이 무뚝뚝한 그의 등뒤로, 어둠이 조금씩 날아 앉고 있다 외등이 심장 하나를 꼭 쥐고 깜빡거린다
원룸의 자궁 안에 그는 돌멩이처럼 박혀 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모로 누워도 바로 누워도, 꼭 맞는 자세는 없다 망할 봄날! 기어이 여자가 그를 낳은, 花月之風에 젖은 눈알들이 많이도 비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날이다
김중일 시인 / 달력
밤에 빌딩이 달력처럼 일렁이며 걸려있다
열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단지 백열등 같은 동그라미 안에 기억의 불이 환한 날과 캄캄하게 지워진 날,
불이 들어온 날들과 불이 꺼진 날들 불이 꺼진 어떤 날에 불현듯 불이 난다
밤과 밤이 부싯돌처럼 부딪힌다 부질없는 바람이 불고 영문 모를 불이 순식간에 번진다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력 한 장이 활활 타고 있다 불타는 달력을 지나쳐 내 기억이 여태 사는 날짜로 귀가한다
기일과 생일이 잔뜩 입주한 달력을 온전히 내버릴 수 없어 바람 없는 날을 잡아 태우기로 한다
김중일 시인 /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시'라는 침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팔베개를 한 팔이 저려온다. 감각이 사라진다. 네가 눈 감고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하릴없이 바라본다. 마치 전생처럼 썰물처럼 내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깜박깜박 잠이 밀려온다, 미래처럼 밀물처럼. 우리는 함께 잠긴다. 책장을 넘기듯 등이 찰나 꺼졌다 켜진다. 가수면 상태에서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어느새 깼는지 아니면 잠들지 않았는지, 내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홑이불 같은 너의 목소리를 끌어 덮는다.
전 세계 해변의 면적은 어느 정도일까? 최소한 그 면적의 합은 서울보다 클 거야. 서울이 다 뭐야, 최소한 우리나라보다는 클 거야. 우리나라가 뭐야, 웬만큼 큰 나라보다는 클 거야. 적어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시 세계'에서만큼은 그 모든 나라를 다 합한 것보다 클 거야.
드넓은 해변의 모래. 지난여름 내가 한쪽 발로 절뚝이며 모래 위에 쓴 너의 이름. 해변의 모래는 죽은 이들이 미처 못한 말들이 해와 달빛에 그을려 부스러진 잔해들이야.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라텍스 침대 위를 눈을 감고 걷는다. 한껏 달아오른 해변의 모래에 네 발목까지 다리가 푹푹 빠진다. 죽은 이들의 화장된 말들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네 콧등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무슨 소리가 좀 들려? 내가 걱정스레 묻는다.
한없이 밤이 이어지고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세상 약속의 절반 이상은 사라질 텐데.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내일 또 보자, 라는 말을 못 지킬 약속으로 남기는 일은 다시 없을 텐데.
밤의 벌어진 검은 입 밤이 창문들을 벌리고 도시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는 시간. 갓난아기처럼 밤이 울면서 기어 오고, 창문마다 둥근달이 우유병처럼 꽂힌다. 되레 밤을 꿀꺽꿀꺽 삼키며 세상에 흘러넘치는 흰 구름들. 책장을 덮듯 밤이 하얗게 잠든다. 밤에 링거액처럼 눈물들이 듣기 시작한다.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커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너는 내일 아침에 또 보자는 약속도 없이 창문을 통해 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너는 시 속으로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사람 같다. 시 밖에서 우리는 생면부지다.
김중일 시인 / 미안의 안녕
마침내 나는 오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후를 가졌다. 봄비가 눈으로 뒤 바뀌었고 우산은 비와 눈 사이에 꽂혀 있다. 가장 높은 하늘을 나는 도중 정전처럼 불시에 숨이 끊긴 새들의 찰나를 드디어 나도 가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은 내 가슴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흔적이 없다. 나는 온몸을 샅샅이 뒤져 꽃다발을 찾다가 우연히 누가 놓고간 우산을 주웠다. 구름들과 한 우산 속에서 어깨를 걷고 광화문 앞 희뿌연 폭설을 뚫으며 걸었다. 유빙처럼 표류하던 버스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 가닥의 자일을 그러잡듯 우산 하나씩 꼭 붙잡았다. 오직 터진 허공 같은 우산을 악착같이 붙잡은 사람들만 서서히 녹아 가라앉고 있었다. 이토록 가엾고 선량한 우산을 언젠가 제 손으로 고이 접어 잃어버릴 수 있도록 오늘만은 놓치지 않게 꼭 붙잡고 있었다.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 우산과 함께 유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네지 못한 커다란 꽃다발 같은 우산을 잃어버리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지개를 가졌다. 내 이별은 안녕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내 미안은 안녕을 가지지 못했다.
김중일 시인 / 국수처럼 쏟아지는 잠
한 사발의 잠에 국수를 말아 먹는 밤에
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밤에 폭식의 밤에 썩은 이빨처럼 까만 창문들 사이에 끼어
지구가 시커멓게 벌어진 입처럼 둥근 지구가 천공의 빗줄기를 태풍처럼 둘둘 말아 한 젓가락에 후루룩 끌어당기는 밤에
영문도 모르고 땅과 바다에 묻힌 사람들은 배가 부르다 지구처럼 지구만큼 터질 듯 배가 부르다
영문도 모르고 살아 있는 나는 배가 고프다 부재자의 잠은 완전히 침수되고 들고나올 살림이 하나도 없는 부재중인 한 사람의 잠에 국수를 말아 먹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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