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종규 시인 / 난파하다 외 14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6. 08:00
송종규 시인 / 난파하다

송종규 시인 / 난파하다

 

 

열두 시는 내가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그 집의 소파, 그 집의 고양이, 그 집의 전화기, 그리고

너도밤나무 숲을 휘돌아 마을로 내려온다

그는 우두커니 자판기 앞이나 벤치에 앉아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날마다

열두 시와 약속을 하고 열두 시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뜨겁고 깊은 국솥에 발 넣었다가 황급하게 빼는 태양

국그릇 위에서 뭉클 백 개의 해가 뜬다

 

공중에 널린 새들의 날개, 그리고

난무하는 빛들의 창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 공중에 불그스레 꽃물이 들고

제 이력의 1호 봉투를 들고

누군가 떠나간다

 

열두 시는 내가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그 남자의 과거, 그 남자의 넥타이, 그 남자의 체납 고지서, 그리고

가문비나무 숲을 휘돌아 마을로 내려온다 아니, 공중에서 난파한다

기적 소리 울리며 누군가 어깨를 웅크린 채

다시, 돌아온다

 

 


 

 

송종규 시인 / 기이한 밤

 

 

어둑어둑한 이 시간 속에 무수한 틈이 있다

틈 사이에 끼인 문장을 읽는 것은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읽히지 않는 페이지 속에 존재하는 나는 이 세계 속

불완전한 문장일 뿐이지만

몇 개의 이미지들이 겹치는 호수의 수면과, 소멸의 모든 찰나들,

자욱한 새들의 둥지, 만발한 공중을 끄집어낼 수는 있다

 

느티나무 위에 번쩍이는 독수리 모형들이 매달리고 나서

새들은 사라졌다, 빈 둥지 가득 허공과 들판을 들여놓고

 

초록색 모자를 쓴 남자 몇이서 긴 막대기로 툭툭 둥지를 두드렸지만

여기에 없으므로 새들은 끄떡없다

 

이것은 사실

형이상학도 아니고 신파도 아닌 어떤 생의 틈새 이야기

 

공중에는 부서진 모음들과 분홍으로 넘쳐났지만

공중은, 슬픔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는, 도대체,

 

남아있는 이 풍경 속으로 당신을 불러들이고 싶지만

당신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

잠 속으로 초록색 모자가 따라 들어오는 기이한 밤

책을 덮어도 나는 닫히지 않는다

아주 구체적으로, 나는 흩어진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달의 표정

 

 

 찡그린 표정 때문에 그의 얼굴은 컵 속의 푸딩처럼 일그러졌다가 중심을 향해 모아지곤 했다 가끔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얼굴이 찌그러진 액자처럼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먼데서 달려온 달빛이 스크럼을 짜고 에워쌌지만 슬픔은 더 단단해지는 듯 보였다

 

 봄날이 복사꽃 들판을 빠져나갈 무렵, 그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몇 개 불필요한 나이테가 정수리에 그어졌고 운무처럼 소문이 자욱하기도 했다 누군가 떠나간 자리에 잡초들이 무성하게 뿌리를 내렸고 이슬방울 같은 눈물이 매달려있었다

 만약 사람의 생애도 뿌리 채 옮겨 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햇빛의 일이고 여기에 없는 시간의 영역

 감정은 쉽게 증발하지 않는다

 연속적으로 일그러지는 찻잔 속

 저, 달의 표정

 

-<문파> 2020년 겨울호

 

 


 

 

송종규 시인 / 비파처럼

 

몇 개의 감정들이 달빛 아래 모여 있는 그 아래

비파처럼, 몽환적인 풍경들이 도열해 있고

접시 위에 정갈한 수건이 놓여있다

 

오래 전에 본 듯한 골목길 같기도 한데

삐거덕 녹슨 대문을 밀고 들어 간 적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어느 날 저 나무 아래 앉아 글썽였던 거 같기도 하다

 

그날은 아마 당신이 모르는 오래 전 어느 하루였을 것이다

 

온통 눈부신 빛이 우주를 휘감던 공중에서

빛으로 뭉쳐진 커다란 사람이 천둥소리를 내며

공중 높이 떠있었다

접던 수건을 내팽개치고 내가 뛰쳐나간 뒤

폭풍처럼, 별들이 휘날렸다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대문 앞에 서 있던 몇 사람이

금세 하얗게 늙어있었고

슬픔은 마치 안개처럼 골목 위에 둥둥 떠다녔다

 

그날은 아마 내가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오래 전 어느 흐린 날이었을 것이다

내 방에는, 아주 오래된 달력 하나가 걸려있다

​​

계간 『아포토스』 2023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바람의 문장들

 

밤의 머리카락을 딛고 제비꽃이 다녀갔네

베갯잇에 묻은 보라색 꽃물

 

행성들이 몇 바퀴, 온갖 염려의 주위를 돌고나서

호흡의 끝에 운무와 윤슬, 그 봄날의 네 맨발

내 안 해안선까지 따라들어 오는 햇빛과 바람의 문장들

 

기다림을 대신하던 창은 거리낌 없이

말랑해지거나 최대한 현명해지거나

 

문득 빗소리처럼,

 

그립고 지루했던 생애와 사건들을 누설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창은 계절이 오고가는 빛들의 서식처

 

조금 위험한 생각들이 밤의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꽃물과 어둠은 비상식적으로 확장 된다

내밀한 연애처럼, 네 맨발이 종잇장처럼 고요해 진다

​​

계간 『문학청춘』 2023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전병을 굽는 시간

​​

 

당신이 어깨를 구부려

​문장 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던 밤이었고

나는 막 전병을 구우려던 참이었다

뭔가 쏜살같이 관통해간 내 몸이 기억하는 무수한 냄새들

흐느낌들, 안개들,

무성한 두근거림 때문에 나는 우두커니 그곳에 서있었고

잠깐 사이 당신은 물방울처럼 사라졌다

밤의 우주 속으로 스며든 것들, 전율

환영, 그리고 비애

한 때 내 몸에도 깃털이 있다고 믿었다

당신이 스쳐가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 삶에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슬처럼, 당신이 창가에서 너울지지 않았다면

내 생애에 추락이란 없었을 것이다

문장 속에서 다시, 머나 먼 세월

날짜들이 은박지처럼 구겨졌다

전병을 굽기에는 모든 것이 굳어있다

나는 지금 나에게 난생 처음인

​​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아무 상관없는 밤

 

밤이 오는 것은 구체적이지만

네가 오는 것은 다분히 추상에 속 한다

 

너는 미래에서 온 사람

 

아침의 첫 햇살이 저물 때까지 공원과 숲에 밤이 올 때까지

미동도 없는 나비, 창문, 카페의 계단

 

숲에서 나풀거리던 나비가 신호등과 코스모스와 실패한

연애와, 비가 와도 끄떡없는 지붕을 지나서

 

듬성듬성 빗방울이 생각 위를 걸어다니던 그날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화면으로 봤던 캄차카 반도를 떠올렸지만

사실 캄차카와는 아무 상관없는 밤이었다

 

내일 밤에도 상관없을 게 분명하지만

나는 다만, 네가 보고 싶었을 뿐

너는 스며들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사무치거나 흔적 없거나, 마치 나비처럼

 

캄차카를 꿈속까지스 불러들인 건

시차를 고려하지 않은 흐트러진 머릿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꿈결 같은 상태에서 몇 분

 

간, 한 생이 지나가기도 한다

​​

계간 『아포토스』 2023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수북한 밤 열두 시

 

바람과 구름의 시간은 느슨하거나 때로 촘촘하기도 하지만

얼룩 같은 이 시간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손 편지 같은 날짜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이곳 호숫가에는

반짝이다 저무는 저녁의 물비늘과 노래의 끝에 매달린

차디찬 고드름

 

지금, 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어깨는

방금 막 도착한 비탈진 문장

 

서늘한 한 사람의 생애를 내가 받아 적을 때,

한없이 어둑한 문장이 노을을 받아 붉으스레 물들 때,

 

수많은 질문과 협곡과 봉분들을 넘어서

 

곧 밤 열두시가 당도할 것이고 밤 열두시는 열흘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당도할 것이다 수북한 밤 열두시

 

우산도 없이

밤 열두시에 안착한 저 순결한 하양나비

​​

계간 『문학청춘』 2023년 겨울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새벽

 

 

저것은 미래의 표정

 

최후의 빛처럼, 정신의 틈새에 끼어든

밤의 생각처럼

 

누군가 휘갈겨 쓴

한 시절은 짧은 봄밤 같다는 문장 곁에

방금 막 피어난 히야신스

 

저것은

호수를 배회하던 석기시대의 젊은 얼굴

 

겨울 숲에서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솟구치던

그 날 호수는 음계처럼 사려 깊었지만

사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네

 

저것은

의심이 정박한 은쟁반, 혹은

 

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어버린 구름의 생각

계간 『시인시대』 2023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지리멸렬한 산책

 

 

분홍과 회색으로 칠갑한 하늘이 호수 위로 내려온다

완두콩처럼 작은 생각들이 나란히 호수 위에 따라 눕는다

아픈 손가락은 대책 없이 지리멸렬 해 지기도 하지만

분홍하고 회색이 섞이면 공중이나 못물은 대체로 시월처럼 깊어진다

당신의 안부가 궁금한 나는 또 난수표 같은 글자를 긁적여 보기도 하고

시계바늘처럼 천천히 못 둑을 걷기도 하지만

오리배가 정박한 모퉁이에서 문득

몇 세기가 훌쩍 지나 간 거 같기도 하고, 당신은 멀고 낯선

행성인 거 같기도 하고

 

가난한 것에는 모두 물기가 묻어있다

저 노을빛,

주먹을 꽉 쥐면 행주처럼 주루룩 물기가 흘러내린다

 

계간 『동서문학』 2021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소나기

 

 숟가락과 블라인드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맴돌았다 소요와 구름도 공중에서 떠다녔다 바퀴 달린 의자가 빙글빙글 내 곁에서 맴돌았다

 

 별들이 딸랑거리며 푸른 손을 흔들고 있었을 때,

 일식은 지나갔다

 수많은 아이들이 별처럼 쏟아져 내렸고 나는

 한 우주 속으로

 배추흰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끓고 있던 주전자가 고요히 멈춰 섰다, 만리 밖에서 국경선은 증발했다라고 당신이 파발을 보내왔다

 

 초록 잎사귀들을 데리고, 가문비나무가 수평선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간 『시인 정신』 2013년 여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다시, 범람하는 방

 

 

하얀 봉투를 들고 들락거리는 죽음과, 하루 종일

창 밖으로 걸어나가는 계단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시계 바늘과 그렁그렁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는 수도꼭지와

 

그는 바늘에 찌를 끼우고 낚싯대를 던진다

생선가시가 콱, 목에 걸린다

멀미하는 고등어들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흙으로 가득 찬 시계를 털어 누군가

바다에 건다.

계단은 물 속에 잠긴다 謹弔燈을 켜든

발자국 소리가 그렁그렁, 창문에 매달린다.

 

 


 

 

송종규 시인 / 유리창

 

 

오후 두시의 화분에는 빛들의 어린 앞니,

나는 낡은 문턱에 걸터앉아 있고 빛들은 무한정 확장되어 간다네

 

구름은 이곳에서 가장 먼 풍경

 

당신이 보고 싶은 누군가 블라인드를 올리고

 

유리창은 바람이 쓴 필기체로 자욱해 지네

 

빛들의 어린 앞니가 커다랗게 자랄 때 까지

 

슬리퍼를 끌고 오는 아주 편안한 기별을

 

나는 기다리지

우주적으로, 홀연히,

 

이곳에서 당신은 가장 멀고도 낯선, 한 장의 풍경

 

계간 『시와 사상』 2023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백야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 곧 겨울이 닥쳐왔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공원 부근에서 목 놓아 운 적이 있는데

겨울은 온전히 지상의 것

넝마처럼 바닷가를 걸었지만, 뜨거운 밥상 앞에서 울컥울컥 목이 메었지만,

그곳은 우주의 바깥 아니면 세상에 없는 계절

매일 어김없이 찾아오는 밤 열시, 그리고 행성들의 운행 중에

서럽고 향기로운 말들이 밤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이건 멀리서 보낸 수취인 불명의 젖은 문장

하루 이틀 열흘 일 년, 당신이 가시고 나서

백 야처럼 긴 겨울 달이 국 그릇 속에서 떠오른다

 

계간 『문파』 2020년 가을호 발표

 

 


 

 

송종규 시인 / 꼬리명주나비

 

 

빈 접시에 초록 잎사귀 하나가 붙어 있다

 

어느 연대 어느 세기에 당신이 날려 보낸 나비인지

 

잘못된 문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어린 빛들의 발가락처럼

 

나비는 원래 고요하고 순결한 순간에 존재하는

몽환적인 한 장의 스냅이기도 하지만

도무지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낮은 변방에

나비는 존재 한다

 

초록 나비가 내 집에 날아왔다

가난한 생각들이 우루루 몰려와 그 곁에서 울었다

 

계간 『시와 세계』 2023년 봄호 발표

 

 


 

송종규 시인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고요한 입술』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녹슨 방』 『공중을 들어올리는 하나의 방식』. 2005년 대구문학상 과 2011년 제31회 대구시 문화상, 2013년 제3회 웹진『시인광장』 시작품상, 2015년 제13회 애지문학상, 2017년 제10회 웹진『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 수상. 2021년 제14화 이상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