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시인 / 동기와 원인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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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시인 / 동기와 원인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뉴스를 껐습니다 주인공이던 동기와 원인이 빠져나옵니다 동기는 자발적이고 원인은 능동적입니다 지금 심정은 어떠신가요? 장난입니까? 착란입니까? 서로 질문만 되풀이합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들을 생각과 들을 이유와 들을 필요를 밀어냅니다 지겨워합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 일은 마음이 아픕니다 상대방이 먼저 공격을 했습니다 우린 정의를 신뢰할 뿐입니다 이 말을 꼭 덧붙입니다 그렇게 동기와 원인을 부정하자 괴물이 탄생합니다 명분이 폭발합니다 보복과 응징과 서러움이 난무합니다 이전과 이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해석과 알리바이 침묵과 편두통 재구성은 기어이 실패하고 사과와 용서가 멀어집니다 또다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냥 우리 둘 다 성격을 들키지 맙시다 동기와 원인이 동시에 회피를 해피로 바꿉니다
하린 시인 / 호모소모품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표절했다 형벌도 각주도 없이 지금의 세계는 무탈했다 패배는 칼로리가 높았고 실패는 자꾸만 비대해졌다 존재의 가벼움은 책 속에서만 발굴됐고 출근의 의지와 퇴근의 의지가 무릎의 쓸모를 이어 갔다 안과 밖이 구분되면 오랜만에 일요일이 도졌다 흔한 십자가 아래엔 질문들이 퇴적했고 나에게 찾아온 대답은 매번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은 무슨 저의이고 내가 나를 비난하는 것은 무슨 계약이었던가 월요일과 금요일의 차이를 알 필요 없는 생활 규격화되는 일로 목적 이후가 될 수밖에 없는 생활 3교대를 마치고 돌아오면 위가 자꾸 뒤틀렸다 밥솥 안에선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는 밥알의 표정들이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 때 격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던 추의 떨림은 유일한 친밀이었다 일용할 양식 앞에 무릎 꿇리던 압력은 한결같이 힘이 셌고 쉰내 나는 희망을 퍼먹었다 기다리는 것들의 독한 심지를 독하지 않게 맛을 봤다 죽음이 노크하다 돌아서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끝까지 잔인하게 신의 입맛을 돌게 하는 생존이라는 의지 아직은 내 안에 풍부했다 무덤 속 같은 어둠과 한 번 더 결속했다 나는 이 도시의 하부구조에 최적화된 최저 임금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발표
하린 시인 / 기분의 탄생 - 이중부정
부정적인 생각을 부정하면서 부정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지
내 몸은 부정이 가진 역사
어머니는 나를 낳고 싶지 않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긍정했지
이름은 왜 착할 선 넉넉할 우였을까
거울에 비친 선우를 아무리 사랑해도 부정은 사라지지 않았지
반감이라는 괴물 바닥을 칠 줄 모르는 인내심 실패한 사랑들 사람들
모두 부정이 만든 음모로만 보였지
부정의 비린내를 맡아서였을까 길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따라왔지
(기)넌 버려진 오답이고 난 쉽게 들킬 약점이니까 가까이 오지 마(기)
부정이라고 이름을 짓고 키웠지
부정이 나를 맹신했고 나도 부정에게 곁을 내주었지
반감이 반가움으로 바뀌었고 인내심이 낙법을 배웠지
부정을 품은 또래들을 만나 술을 마시며 기꺼이 실패를 나눴지
오늘도 부정이 부정을 옆에 두고 잤지 이중부정이 껄껄껄 웃었지 비웃음인지 착각인지 아무도 몰랐지
-계간 『상상인』 2024년 여름호 발표
하린 시인 / 기분의 탄생-강박 이중 삼중으로 저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폴더 속 폴더 비밀 속 비밀 ctrl+c ctrl+v 흔해진다 구워 낸 고등어보다 공장에서 나온 통조림이 안심이다 압축파일처럼 밀봉된 것 고양이용이어도 상관없다 캔 뚜껑을 열면 표정 없는 것들이 꽉 차 있다 바깥이 낯설다 폴더가 아무리 많아도 시가 차지하는 비율은 적다 쓴다 쓴 것을 복제한다 자기 표절과 자기 변용 1000년 동안 시를 써도 겨우 500MB조차 되지 못하는데 당신과 1년 동안 찍은 사진의 용량은 5GB가 넘는다 당신에 대한 만 편의 연작시를 쓸 수 있지만 쓰지 않겠다 사진은 빠르고 시는 느리니까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강박이 있고 나는 숨김을 숨기려는 강박이 있다 강박은 완벽하지 않다 안전하지 않다 내 속엔 적막한 폴더들, 가득 찼다
하린 시인 / 만약 내가 불타는 종이의 유언을 듣게 된다면
내가 종이를 버린 게 아니라 종이가 나를 버린 거라고 확신하게 될 거다 종이는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솔직성의 한계를 밤새 나를 내려다본 형광등의 측은한 태도를 연애의 감정이 쓸모없게 변한 순간을 내가 쓴 시가 내가 죽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읽혀지지 않게 될 예감을 취미는 없고 취향만 있는 결핍을 감당하지 못한 동물성과 실천하지 못한 식물성을 어설프게 흘려보낸 한 밤의 열기를 아침마다 휘발된 줄 알았는데 주기적으로 다시 찾아오던 좌절의 민낯을 매번 망설인 것이 글자가 아니라 종이만 보면 움츠러들던 상투적인 나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정해진 비극을 향해 무작정 몸부림쳤던 낮의 자책과 밤의 자학을
재만 상징처럼 남는다 땅속에 묻는다 그 자리에 그 어떤 것도 피어나지 말라고 기도한다
하린 시인 / 로드킬
슬픔의 피를 밤새 빨렸다 기억의 등뼈가 휘청거렸다 일어서고 싶었지만 별들의 참견이 다분했다 고상한 명분과 속물적인 생각들이 변별점을 잃었고 로드무비를 위하여 방향성이 사라졌다 명분도 충고도 없는 상태가 지속됐고 유령이 심장 앞에 버젓이 출몰했다 차갑거나 따갑거나 허하거나 씁쓸하거나 헐떡거리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표정과 숨소리와 목소리가 실감으로부터 멀어졌고 신이 나를 소환하면 앙상한 의식이 파열될 것만 같았다 목격자가 바이러스와 벌레와 곤충과 짐승들뿐이라서 망설이는 것은 사치였다 다짐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회개를 재빨리 실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은 그때그때 하는 건데, 나를 길들이려고 했던 위계와 질서에게 욕설을 해줬어야 했는데, 아비라는 이름을 갖고도 아비를 이해 못한 콤플렉스 따윈 버렸어야 했는데, 사기 친 자와 음해한 자들을 나의 분노 속에서 게워낸 후 돌려보냈어야 했는데, 어젯밤 비싼 요릿집 앞에서 3초간 머뭇거린 못난 태도를 0.5초 만에 버렸어야 했는데, 관계의 낯섦과 어색함에 얽매인 당신들에게 내가 먼저 거절하는 자세를 내밀었어야 했는데, 나로 인해 죽었던 동물과 식물들에게 일요일마다 사과를 했어야 했는데, 구질구질한 거처 속에 남겨진 나의 미완성 작품들을 깨끗이 버렸어야 했는데…,
자꾸 후회가 명징해졌다 눈을 뜬 채 세상을 감았다 -《한국시인》 2022년 봄・여름호 발표
하린 시인 / 선택
폭죽과 폭탄 중에서 난 폭죽을 선택했어요 어차피 주성분은 같으니까요
그거 생각해본 적 있나요 폭죽이 터질 때 공중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폭탄이든 폭죽이든 지금만 사는 나에겐 주저함이 없었어요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공중을 물어뜯겠어요 한여름밤의 피 내게만 보일 거예요
아, 혼자니까 생일날 폭죽은 괜찮겠죠
혼자 축가를 부르고 혼자 박수를 치고 혼자 일요일을 견딘다면 혼자라는 단어도 지겨워지겠지요
그것마저 귀찮아지면 기념일을 전부 잘라낼 거에요
생일인데 밥은 먹었니? 내 기념일을 나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슬퍼할 일과 불편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선택이 원인인지 과정인지 결과인지 미래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난 나를 지우는 선택을 할래요 비겁하지만 폭죽을 삼킬래요 눈물 아니면 구토 고독 아니면 치욕인 날들
어차피 결론은 같을 테니까 바깥을 전부 사양할래요 마지막까지 혼자만 아는 혼자로 남을래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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