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차주일 시인 / 한순간이라는 생물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08:00
차주일 시인 / 한순간이라는 생물

차주일 시인 / 한순간이라는 생물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꽃이 있다.

한쪽 꽃잎을 떼어 버리고 만든

비대칭으로 스스로 흔들고 있다.

 

불균형 비행으로 비대칭을 찾는 나비가

꽃잎 버린 자리에 앉는다.

 

나비 날개로 꽃잎을 채운 꽃과

꽃에 다리를 접붙인 나비가

한순간에 들어 하나로 고요하다.

 

한순간이라는 생물은

식물과 동물이 나뉘기 전의 감정.

왜, 식물은 동물의 이동을 찾으며

왜, 동물은 식물을 감정을 빌리는가.

 

기어이 내 눈동자를 찾아내 머무는 꽃과

이성을 찾아 떠도는 내 체온의 향방을 묻지 않는다.

 

내가 오늘에 도착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차주일 시인 / 거울악보

 

 

방치된 낡은 거울, 그를 들여다보다

나와의 거리만큼 뒤로 물러나

나를 보듬고 있는 그의 품을 처음 보았다.

내가 그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는 더 깊은 품속으로 나를 끌어안았고

빛나게 닦인 나를 투사하고 있었다.

거울의 망막에 침전되고 있는 부식은

나를 닦으면서 생긴 얼룩이었다.

깨어져 버림받고서도

배설할 수 없는 운명 고스란히 품던

거울 같은 사람이 내게도 있었다.

어머니가 얼굴에 그려대던 검버섯들

주름마다 걸어둔 음표들은 나의 자취였다.

평생 단 한 곡만 써 낼 수 있는 작곡가는 내게

나의 미완성악보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여백 잘 적어내리라 믿으며

 

 


 

 

차주일 시인 / 어머니도 만세를 부르시더군

 

 

첫 고료 받아 어머니 꽃무늬속옷을 사던 날

제일 좋아하는 백일홍무늬 포장지를 골랐었지

꽃잎 하나 감춰질까 투명테이프로 붙여두었는데

테이프 말미가 돋보기렌즈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거야

답답해진 어머니가 안경을 벗어던져버리더니

손끝눈을 깜박이더군......, 세상에

탯줄 끊을 자리 묶듯 단숨에 테이프 말미를 찾아내는 거야

배꼽 아려볼 사이도 없이 쉬 찾아내더라고

진화라는 게 말이야 수세기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더군

한 어미의 일생으로도 남는 것이더라고

어머니는 손끝눈에 침까지 바르고 조리개를 조였지

그런데 무드러지린 손톱이 연신 말미를 놓치는 거야

글쎄 어머니가 손끝눈으로 내 얼굴을 더듬더군

손톱을 짧게 자른 탓이라고 거짓부렁하며 말이야

결국 열지 못한 상자를 장식장 꼭대기 칸에 세우는데

깨금발까지 곧추고도 한참을 바동거리는 거야

그때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지

어머니가 만세 부르는 모습을 처음 보았거든

땅바닥 높이에 길들여진 관절 부러지는 소리까지 나던 걸

삭정이 부러진 품에서 향 짙은 꽃 움 돋는다는 말 알아?

 

 


 

 

차주일 시인 / 거울음부

 

 

들어보라, 제 숨소리 들어보라.

숨은 극한의 간절함으로 나를 지키고 있다.

태 밖 공기를 처음 들이켜 뱉어

어미 염통을 가파르게 한 이래로

모든 숨소리는 거대한 외침이다.

아직도 제 숨소리 들리지 않는다면

숨소리 받아 적어 주는 거울 앞에 서라.

되비침을 소경처럼 내어주고 있는 거울을 보라.

이슬보다 투명한 숨소리 한 방울

제 무게로만 흘러내려 탯길 하나 일군다.

소리를 완성한 방울들 음절음절 모여 흐른다.

탯길이 하구처럼 넓어지고 있다.

그 폭만큼씩 거울음부가 열리고

귀가 알몸뚱이를 끌고 나온다.

나는 나의 출산을 지켜보고 있다

 

 


 

 

차주일 시인 /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딛는 순간 앙다문 울음소리 들린다

숨겨둔 현(絃)이라도 긁힌 양 온몸으로 파장 받아내며

최소 울음으로 최대 울음을 가두었다

증조모의 관을 떠멘 걸음 삭풍처럼 휘어 받고

네발 아기 걸음을 씨방처럼 터뜨렸다

발자국 없이도 걸어가는 시어미 심사가 붙은

종가의 대소사를 활대질로 다 받아주면서

얼마나 울어 지운 것인가

오래된 마루는 나이테가 없다

어머니는 아직도 마루에서 주무신다

봄볕은 모로 누운 어머니를 마루로 여기는 듯

축 늘어진 젖통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걸레질로 지운 나이테가 파문처럼 옮겨 앉은 몸은

걸레를 쥐어짜듯 뒤틀려 있다

모로 뒤척이는 몸에서 훔친 자국 같은 그림자가 밴다

닦을수록 어두워지는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마루의 속을 이제야 알겠다

걸레의 잠이 끝나면 마루 또한 잠들 것이다

제 그림자 숨겨둔 현 지울 때까지 울어재낄 것이다

 

 


 

 

차주일 시인 / 합자론合字論

 

 

포옹이 풍습으로 떠돌기 전

 

동물의 자세로 사람을 궁리하던 그가

직립으로 두 손을 만들어 이성의 얼굴을 만졌다네.

 

이성의 표정을 가져와 제 얼굴을 꾸리고

이성의 체온으로 제 감탄사를 만들었다네.

 

이목구비가 뒤섞인 낯선 얼굴이 제 목소리를 냈으므로

포옹은 최초의 상형문자가 되었다네.

 

동물의 자세에 사람의 목소리를 합한 불완전이

수많은 기호로 옯겨졌다네.

 

불완전을 완전으로 오독하게 하려고,

상형문자를 표의문자 되게 하려고,

목탄과 붓을 만들어 뜻을 기록한 사람이 있었네.

 

찍고, 누르고, 머물고, 내긋고, 삐치고, 뻗고

뜻이 태도가 될 때마다 사람의 목소리가 늘어났다네.

 

기호가 자세를 구분하고

목소리가 문화를 구분하였지만,

 

아직도 뜻이 없이 통용되는 인류 공통 감탄사가 있어

뜻의 동의어 체온이 인종을 오간다네.

 

이것은 목소리를 부수部首삼아

새로운 자세를 이루라는 첫 사람의 전언이 아닐까?

 

동물의 자세를 부수 삼았던 첫 사람은

목소리를 부수 삼는 내 자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네.

 

나는 가끔 낯선 목소리를 내느라

나를 안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네.

첫 사람으로부터 건너온 체온을 끊임없이 배열하는

 

-시집 <합자론合字論> 에서

 

 


 

 

차주일 시인 / 그리움, 그 뻔한 것에 대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면

뒤돌아보는 시야만큼 공간이 생겨난다.

 

부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만큼 팽창하는 영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배지.

외곽을 허물어놓고도 자신만 탈출하지 못하는

 

누구도 입장할 수 없는 성역聖域에

과거로 얼굴을 펼치고

미래로 표정을 그리는 사람은 쉬이 눈에 띄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표정이 생각나지 않아

내 얼굴에 무표정이 머문다.

 

무표정이 진심이라는 풍문이 떠돈다.

 

-시집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에서

 

 


 

차주일 시인

1961년 전북 무주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학. 2003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냄새의 소유권』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합자론合字論』. 산문집 『출장보고서』. 계간 《포지션》 편집 주간. 2011년 윤동주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제14회 혜산 박두진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