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경숙 시인 / 채집된 과오 외 7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7. 08:00
김경숙 시인 / 채집된 과오

김경숙 시인 / 채집된 과오

 

 

과오를 채집하다 보면

봄볕에 따갑게 부끄럽다

 

철없음을 나이별로 분류하고

얼굴 온도를 붉히다 보면

과장된 날개로 붕붕 날았던 기억들을

압정으로 눌러 놓고 싶다

 

계절별로 채집된 과오들

부풀려진 날개는 제각각 다르지만

공중을 휘젓던 기고만장과

지상에 뿌렸던 휘청거림은 종류가 같다

 

채집된 과오가 늘어날 때마다

두꺼워지는 반성은 무겁기만 했고

점점 넓은 채집판이 쌓여서

더러는 타인의 갈피를 빌리기도 했고

때로는 뒷장에 슬쩍 끼워 넣기도 했다

두 벌 날개들

 

얇은 봄볕은 어떤 걸 감춰도 환하게 비치는데

투명해진 과오들은 오히려 아름답다고

따사로운 바람은 채집 낱장을

파르륵, 넘어가고 있다

 

-2019, 월간문학 5월호

 

 


 

 

김경숙 시인 / 꽃 하나를 풀고 왔다

 

 

사방을 끌어모아

꽃 한 송이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꽃은 다

매듭 같아 보인다

 

주섬주섬 싸서 갔던 곳에다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매듭을 풀고

꽃인 양

이것저것 풀어놓고 왔다

 

빈 보자기는 또 펄럭이지도 못하는

풀죽은 바람 같다

 

가방은 그 속에

갸우뚱, 의문들이 들어있지만

보따리는 아무리 야무지게 싸도

들어있는 것들의 윤곽이 보인다

 

그러니 야무지게 봄을 묶어 놓은 저 꽃들은

하나같이 보따리 사방을 끌어모아 놓은

보자기 매듭 같아 보인다

 

묶은 순서를

되짚어 푸는 꽃

 

풀고 간 꽃잎 자리엔 파란 열매들이

보따리 속인 양 남아있고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씨앗들 속엔

야무지게 묶어 놓은 내년이 들어있겠다

 

애써 모은 뭉치를 들고 온 사람을

환한 봄을 맞듯 반겼을 것이고

혹은 들고 간 적 있는 사람은 꽃핀 날 인양

마냥 즐거웠겠다

 

묶은 손과

푼 손이 만나는

꽃핀 날,

 

나무들은 또 쏴쏴 숲을 풀어놓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김경숙 시인 / 바람개비

 

아버지는 바람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연 사흘즘 사라졌다

돌아오는 날이면

지하 단칸방에

날선 회오리가 일었다

집어 던진 세간이

미닫이를 부셨다

그때 어머닌 깨어진

어둠을 끌어안고

밤새 거친 눈물을

깁고 계셨다

아버지는 눈물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판을 쏘다니다

바람에 얻어맞아

집으로 돌아온 날

눈물바람이 일었다

기저귀에 엉켜 붙은

얼룩이 당신 몫인 양

구린내 나는 바람을

삶아 헹구며

날마다 허리가 굽어가던

어머니는

바람을 안고

세검정 가파른 골목마다

새우젓 비린내를

이고 나르면서

머리카락이 소금에 허옇게

절여질 즈음에야

툭하면 깨어지던

미닫이문을 버리고

비로소 방 두 칸짜리

집을 장만했다

아버지 저 세상으로 가신 뒤

삼십년이 지나도록

그 바람을 못 잊어

달빛 어른거리는

소리에도 창을 열고

어둠에도 안부를 묻는 어머니

아예 뼛속에 바람을 들여놓고

훌훌 날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김경숙 시인 /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돋보기를 걸친

묵은 곰팡이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반겨주는 골목에서

첫닭이 울기도 전에

젊은 엄마가

샛별을 이고 걸어 나왔다

하루 끼니를 벌기 위해

관절마다 찬바람이

드는 줄도 모르고

정수리에 못이 박히도록

짓무른 발바닥을 끌며 절며

재첩국 사이소

구덕산 비탈마다

웅크리고 칼잠을 자는

낡아 허기로 얼룩진 창에게

뜨끈한 재첩국

한 대접씩 배달해 주었다

엄마 몰래 지폐를 꺼내들고

날마다 책방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백열등 뒤에서

소월과 종일 뒹굴었다

책장에 기대

어린 왕자와

첫 입을 맞추었고

헤밍웨이와 몇 달을

동침하고 돌아왔다

반백이 된후 였다

낯익어 물컹물컹한

골목에서

팔순 엄마를

눈물로 열람 중이다

 

 


 

 

김경숙 시인 / 배꼽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배꼽이란 열었다가 다시 닫아놓은 문이다 떨어져 나오면서부터 슬픔을 배웠고 아물어가면서 슬픔이 없어진 그 문 속에서 종종 한 가계의 설계가 이루어지곤 하는데, 문중의 어른들이 둘러앉아 더 튼튼한 배꼽과 질 좋은 배꼽의 생산에 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고 보니 배꼽은 슬픔을 오롯이 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떨어져 나온 일이나

 떨어져나간 일들의 순차가

 무던하게 아물어 있는 곳

 

 세상엔 배꼽 없는 배도

 배 없는 배꼽도 없다

 

 


 

 

김경숙 시인 / 라일락과 들국화가 다른 계절이듯

 

 

 눈과 코 그리고 귀 중에

 가장 먼 거리를 냄새로 달려가고

 또 달려온다는 코

 

 밤늦게 묻혀온 냄새 하나를 문 밖에서 탈탈 털고 문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이불 속에 꽁꽁 묻고 잤지만 엄마 코는 귀신같아서 귓불에 남아있던 냄새 한 오라기를 기어코 찾아내서 다음 날이면 두근거리던 비밀들이 모조리 들통 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냄새의 구석에 대해 다그쳤고 나는, 자꾸만 숨겨야 되는 냄새들이 하나씩 늘어가면서 우리는 차츰 익숙한 냄새로 서로를 알아보고 생소한 냄새로 눈치를 보는 식구가 되어갔다

 

 어린 냄새와 묵은 냄새를 두고 모두 같은 코의 소속이라고 했지만 라일락과 들국화가 다른 계절이듯, 냄새에도 나이가 있어

 

 나만이 아는 냄새를 은밀히 익혀가고 있을 때

 

 아버지가 달포 만에 집에 들어오시던 날 밤중에 부엌구석에서 흐느끼고 있는 엄마의 코에 진창으로 번지던 눈물에서 살면서 묵인해야만 하는 뼈아픈 냄새가 하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파릇한 가시에 독 오르듯

 어떤 냄새는 가슴을 찌르고도 남는다는 것을

 그때 보았다

 

 


 

 

김경숙 시인 / 분봉

 

 

 분봉 중인 아까시꽃들

 새로 생긴 나뭇가지 끝으로 한 뭉치

 꽃무리가 부풀어 갑니다.

 

 저건, 분명히 벌들에게 배운 방식일 겁니다.

 

 꽃들은 벌의 속도로

 봄밤과 초여름 밤을 날고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선 알전구들이 집단 폐사했다고 합니다만

 똑딱, 피고 지는 스위치들 주변은

 늘 거뭇한 먹구름이 끼어 있기 마련입니다.

 

 분봉 속엔 한 마리 중심이 붕붕거립니다.

 세상은 좁아지고 다시 넓어지고

 마침표 하나가 막아버린 벌통 입구를 오해라 말하지만

 오해를 직역하면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중심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뉘면서 생기는 일이니까요.

 

 오늘 밤엔 꽤 먼 곳까지 벌들이 날아갔다 오려나 봅니다. 북두칠성 부근에서 가뭇한 벌 한 마리가 밤나무 한 그루를 몇 센 치쯤 여름 쪽으로 끌고 간 것이 보인다면 그쯤, 텅 빈 새 벌통을 가져다 놓기 좋은 장소일 것입니다.

 

 다시 좁아져도 늘 똑같은 크기를 유지합니다.

 가령, 사과 씨 하나가 옮겨놓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에는

 새로운 태양계의 군락지가 탄생하니까요.

 

 밤새 꽃들은 아득한 별자리를 향해 분봉하려나 봅니다.

 그 사이, 달콤한 봄이 몇 킬로미터를 북상했습니다.

 

-2024년 제 24회 천강문학상 수상시

 

 


 

 

김경숙 시인 / 지탱하는 것들

 

 

 지탱이라고 적어놓고 보면

 이것보다 미안한 말이 없다

 

 어떤 오지가 있어 주섬주섬 끌어 모은 힘을 쓰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묵묵히 나무 한 그루를 지탱하는 시시각각의 그림자들처럼 지탱이라는 말에는 떼어놓을 수 없는 삼각구도가 있다 세월과 그 세월을 견디는 시간이라는 누옥 한 채 같이 몰락을 받치고 있는 지탱이란, 또 얼마나 적요한가! 파도가 반복이라는 행위로 지탱되고 일 년이 하루하루로 연명하듯 인간의 지탱에는 지루한 연대기가 있다 그러니 아슬아슬한 것들 뒤에는 근심이라는 힘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

 또 근심은 투명한 지탱이어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김경숙 시인

1958년 강원도 화천 출생. 서울디지털대학 문학창작학과 졸업. 2007년 《월간문학》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8년 『수필시대』 수필부문 신인상 당선. 시집 『소리들이 건너다』 『이별 없는 길을 묻다』 『먼 바다 가까운 산울임』 『얼룩을 읽다』 『빗소리 시청료』 『먼지력』. 수필집 『우리 시대의 나그네』. 세종문화예술상 문학대상 수상. (사)한국문인협회 공로패 수상. 부산시단 작품상 수상.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 수상. 『모던포엠』 문학상 본상 수상. 부산문학상 본상 수상. 『모던포엠』 편집위원. 제14회 천강문학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