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시인 / 물 먹는 사람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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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시인 / 물 먹는 사람
윤슬. 윤슬이 튄다. 반짝반짝. 오후 세 시, 11월 윤슬을 데리고 물오리 혼자 논다. 한강에서
모터보트가 끌고 가는 한 사람. 보트 뒤 물살 비틀어 건너다니는 지그재그 즐거운 스키어.
유턴의 지점 보트가 멈추고 고요의 바닥으로 가라앉는 사람. 일 분, 이 분…… 삼 분 만에 다시 검정콩 같은 강물 위의 점.
점이 끌고 나온 몸통, 꼿꼿한 몸통 일으킨 채로 상쾌하게 물살을 가른다.
멀리 은빛 반짝인다. 수정 구슬.
강인한 시인 / 매죽리(梅竹里)
나이 마흔이면 슬며시 산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어느 날 아침 어금니가 문득 찬물에 시린 나이
이 가을에 새로 난 이가 건강한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간다
버스를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고추밭을 걸어 콩밭을 걸어 우수수 우수수 길 솟은 수숫대를 흔드는 바람 고적한 아버지의 바람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매죽리
아랫매대 사람들은 하나둘 집을 비우고 지난 가을 라면을 팔던 주막집 문짝에도 X표로 빗장이 걸렸다
웃매대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개울물이 아랫매대의 한길 옆에서 게으르게 비늘을 턴다 저녁 산이 조용히 흔들린다
강인한 시인 / 상아가 사라지는 모잠비크
초식동물에게도 산다는 것은 본능, 적응하는 건 삶의 수단이다
아가야, 옛날 코끼리들에겐 길고 아름다운 어금니가 있었단다 소름 끼치는 죽음의 놀이터 그 불쏘시개로 필요한 상아
상아가 아름다워서 죽어야 하는 코끼리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래서란다 어금니 없이 태어나는 모잠비크의 코끼리
아가야, 상아가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그 슬픈 행복을 너는 아는 거니?
강인한 시인 / 장미 열차
부드러운 슬픔을 친구의 어깨처럼 기대고 그대는 나직나직이 울고 싶은 게지 퀸 엘리자베스 장미의 이름으로 피어있는 오늘.
겹겹이 여민 분홍 베일 사이로 향기는 흐른다. 오랜 옛날도 바로 어제처럼 기억하며
내가 타지 않은 열차를 떠나보낸다. 잠들지 못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또 하염없이 열차를 떠나보낸다.
작은 장미 정원에서 밤마다 피고 지는 꿈 한 닢 두 닢 헤아리는 그대에게 오월에 떠나보내는 장미 열차
강인한 시인 /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아픔 위에 아픔을 붓는 밤의 크고 고요한 손을 본다. 누군가의 나직한 잠이 흐르고
잠 속으로 툭 떨어지는 빗방울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까이서 뿌옇게 내리는 가을의 분별, 회복할 수 없는 어둠을 토하며 지금 내 피는 닳는다 . 새도록 떠다니는 잠의 바다여.
묵은 책갈피에 오래 파묻혔던 내 손은 눈을 뜬다. 목질의 가느다란 실핏줄과 물결 소리를 자욱이 풀어준다.
사물은 내 피가 닳는 저 어둠의 뒤에서 희게 말하고 희게 웃는다.
강인한 시인 / 환희
깡마른 가지를 하늘로 뻗치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우성친다. 파란 봄의 혈액.
견고한 죽음을 찢고 죽음 위에 다시 태어나는 아름다운 독이여.
_시집 <황홀한 몸살>에서
강인한 시인 / 악몽
초승달이 나뭇가지에 찔려 있다. 붉은 안개가 피 묻은 붕대처럼 천천히 풀리며 내려온다. 자정에 당신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당신의 그림자. 거울을 열고 밤하늘로 내딛는 첫 발자국에 스윽 피가 묻는다. 내일 아침 당신이 못 돌아오게 되면 당신의 그림자가 하류에서 발견될 것이다.
_시집 <강변북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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