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홍해리 시인 / 나는 간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8. 08:00
홍해리 시인 / 나는 간다

홍해리 시인 / 나는 간다

 

 

시인은 들머리로 들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날머리로 나가면,

 

독자는 첫머리부터

시를 읽어

끝머리에서 마감하느니,

 

시는

초장 · 중장 · 종장이든

기 · 승 · 전 · 결로 완성되느니,

 

나는 갈고 또 간다

절 · 차 · 탁 · 마의 한 생이 지고

한 편의 시가 탄생하도록!

 

 


 

 

홍해리 시인 / 둥근잎나팔꽃

 

 

아침에 피는 꽃은 누가 보고 싶어 피는가

홍자색 꽃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고

가는 허리에 매달려 한나절을 기어오르다

어슴새벽부터 푸른 심장 뛰는 소리---,

헐떡이며 몇 백리를 가면

너의 첫 입술에 온몸이 녹을 듯, 허나,

하릴없다 하릴없다 유성으로 지는 꽃잎들

그림자만 밟아도 슬픔으로 무너질까

다가가기도 마음 겨워 눈물이 나서

너에게 가는 영혼마저 지워 버리노라면

억장 무너지는 일 어디 하나 둘이랴만

꽃 속 천리 해는 지고

타는 들길을 홀로 가는 사내

천년의 고독을 안고, 어둠 속으로

뒷모습이 언뜻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홍해리 시인 / 매화나무 책 베고 눕다

 

 

겨우내 성찰한 걸 수화로 던지던 성자 매화나무

초록의 새장이 되어 온몸을 내어 주었다

새벽 참새 떼가 재재거리며 수다를 떨다 가고

아침 까치 몇 마리 방문해 구화가 요란하더니

나무속에 몸을 감춘 새 한 마리

끼역끼역, 찌익찌익, 찌릭찌릭! 신호를 보낸다

‘다 소용없다, 하릴없다!’ 는 뜻인가

내 귀는 오독으로 멀리 트여 황홀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는데

고요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잎의 배

죄 되지 않을까 문득 하늘을 본다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입술들, 혓바닥들

천의 방언으로 천지가 팽팽하다, 푸르다

나무의 심장은 은백색 영혼의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언어의 자궁인 푸른 잎들

땡볕이 좋다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파다하니 뱉는 언어가 금방 고갈되었는지

적막이 낭자하게 나무를 감싸안는다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탱탱한 열매 몇 알

적멸로 씻은 말 몇 마디 풀어내려는지

푸른 혓바닥을 열심히 날름대고 있다

바람의 말, 비의 말, 빛의 말들

호리고 감치는 품이 말끔하다 했는데

눈물에 젖었다 말랐는지 제법 가락이 붙었다

그때,

바로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화려하게 울고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가셨다

전신마취를 한 듯한, 적요로운, 오후 3시.

 

 


 

 

홍해리 시인 / 하눌타리

 

 

노화도 바닷가

갈대는 없고

반쯤 물에 뜬

2층 찻집,

꿈 속으로 갈앉고 있는

건너편 보길도 적자산

보랏빛 그리메,

목포행 삼영호

뿌연 뱃고동

뿌우 뿌우

바닷안개 속으로 울고

까맣게 탄 사내애들이

물 위로 물 위로

안개꽃을 피워 올리며,

하눌타리

천화분을 뿌리에 싣고

젖고 있는

한낮의 목마름.

 

 


 

 

홍해리 시인 / 시를 찍는 기계 -치매행 346

 

 

“마누라 아픈 게 뭐 자랑이라고

벽돌 박듯 시를 찍어내냐?”

그래 이런 말 들어도 싸다

동정심이 사라진 시대

바랄 것 하나 없는 세상인데

삼백 편이 넘는 허섭스레기

시집『치매행致梅行』1, 2, 3집

아내 팔아 시 쓴다고

욕을 먹어도 싸다 싸

나는 기계다

인정도 사정도 없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무감동의 쇠붙이

싸늘한 쇳조각의 낡은 기계다

집사람 팔아 시를 찍어내는

냉혈, 아니 피가 없는

부끄러움도 창피한 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시를 찍는 기계다, 나는!

 

 


 

 

홍해리 시인 / 하늘 밥상

 

 

한밤이면 별이 가득 차려지고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꿈을 떠 먹는다

하늘 열매를, 반짝반짝, 따 먹으며

아이들은 잠자는 사이 저도 모르게 자라고,

나이 들면 허기져도 그냥 사는 걸까

꿈이 없는 사람은 빈집

추억이 없는 이는 초라한 밥상인데,

시인은 생(生) 속에서 꿈을

꿈 속에서 별을, 별에서 꽃을 피우는 사람

사랑은 영혼의 꽃

꿈이 없으면 꽃은 피지 않아

아이들은 별에 사는 꿈을 먹고 꽃을 피우는 시인,

하늘은 그들의 밥상

 

 


 

 

홍해리 시인 / 용천사 꽃무릇

 

 

내 사랑은 용천사로 꽃 구경가고

혼자 남아 막걸리나 마시고 있자니

 

발그림자도 않던 꽃 그림자가

해질 임시 언뜻 술잔에 와 그냥 안긴다

 

오다가 길가에서 깨 터는 향기도 담았는지

열예닐곱 깔깔대는 소리가 빨갛게 비친다

 

한평생 가는 길이 좀 외로우면 어떠랴마는

절마당 쓸고 있는 풍경 소리 따라

 

금싸라기 햇볕이 이리 알알 지천이니

잎이 없어도 꽃은 잘 피어 하늘 밝히고

 

지고 나면 이파리만

퍼렇게 겨울을 나는

 

꽃무릇 구경이나 가고픈

가을날 한때.

 

 


 

홍해리(洪海里) 시인

1942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영문과 졸업.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등단.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월간《우리詩》의 대표로 활동. 시집 『투망도投網圖』 『화사기花史記』 『무교동(武橋洞)』 『우리 들의 말』 『바람 센 날의 기억을 위하여』 『대추꽃 초록 빛』 『청별(淸別)』 『은자의 북』 『난초밭 일궈 놓고』 『투명 한 슬픔』 『애란(愛蘭)』 『봄, 벼락치다』 『푸른 느낌표!』 『황금감옥』 『비밀』 『독종(毒種)』 『금강초롱』 『치매행(致梅行)』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매화에 이르는 길』 『바다에 뜨는 해』 원단기행(元旦記行), 시선집 『洪海里 詩選』 『비타민 詩』 『시인이여 詩人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