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서진 시인 / 행간의 고요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8. 08:00
최서진 시인 / 행간의 고요

최서진 시인 / 행간의 고요

 

 

당신 신발에 내 발을 넣어 보는 일

그 만큼의 고요를 생각한다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것은 페이지를 슬쩍 넘기는 것처럼 쉽다

 

...

말 없는 시간 속에서 비위가 조금씩

당신 쪽으로 기우는 일을

나는 또 고요라 부르는 것이다

 

명료한 슬픔을 가진 자세로 어두워져 가는 저녁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너에게 가던 구름이 붉다

물집 잡힌 뒤꿈치처럼 부르튼 마음이 따라서 붉다

 

어깨동무도 없이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새

허공은 사라지는 시간에 겸손해지는 깊이를 가진다

 

문득 뒤돌아보면,

쓱쓱 지워지고 나는

여기는 어딜까

 

당신의 고요가 내 고요를 신고 걸어간다

 

 


 

 

최서진 시인 / 귀

 

 

절벽 같은 무늬를 가진 나무는

 

어두운 귀처럼 말이 없다

 

어두운 귀가 나무의 소리를 모은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시간을 보듬으면서

 

나무속에는 잘린 나무가 가득 들어있다

 

 


 

 

최서진 시인 / 자작나무 숲에 놓여 있는 체스

 

 

 체스 말을 따라가면 자작나무 숲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손가락과 달이 뜨는 방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거짓말 같은 운명을 모릅니다 달리다가 싸우다가 무덤 앞에 이르러 허공을 보고는 심장이 멈출지도 모릅니다 이곳의 배경은 배경을 두고 사라집니다 떨어지는 저녁 해처럼 둥근 접시 위에 담겨 있는 두 개의 복숭아

 

 주말의 운세를 맞혀 드립니다 체스 말판에서 힌트를 찾아보세요 궁전의 보물을 찾아보세요 가장 밝은 정오에는 체스판을 달릴 예정입니다

 

 자서전의 문장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며 자라나는 짐승 폐허의 억양이 혀 밑에 숨어 있습니다 누가 먹다 만 과일이 있습니다

 

 정오의 파란 대문을 지나 다음 날 붉은 아침까지 왕의 명령을 따라 한 칸씩 피 흘리며 웃는 숲

 

불가능한 왕비처럼

 

 


 

 

최서진 시인 / 바닷가 포도밭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집배원이 바닷가를 달려 갈 때마다 낡은 교과서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맨발을 햇살에 담그고 즐거운 변방에서 늙어가리라 생각했다. 밭이랑마다 축축한 어제의 소문들이 비릿하게 몸속으로 걸어들어와 피가 붉어지고, 붉어진 피는 바다와 한바탕 연애질이라도 하는지 축축한 마디사이로 죽음처럼 헐거워지는 저녁이 생기기도 했다. 봉지 속 어린 포도알들이 작고 둥근 얼굴로 죽음의 냄새를 맡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니 연애편지 한 줄 받아들지 못하고 제 안에 바다를 키워가는 일이라니 무늬없이 차곡 차곡 제 몫의 바람을 주렁주렁 내어주는 일이라니 안으로만 키워내는 슬픔 따위로 제 몸을 부풀리기에는 바다는 너무 가까워 나는 그림자조차도 바다로 주지 않았다. 목마름으로 쌓인 독이 달콤해지도록 마디마다 바다가 눈 뜰 때마다 귀를 키웠다. 까맣게 익어가는 흉터로 넝쿨지던 시절구부리거나 서지도 못하는 서른 살이었다.

 

-계간 『포엠포엠』 2012년 봄호

 

 


 

 

최서진 시인 / 독감

 

 

 신열처럼 들뜬 비린 꽃내음, 푸른 혈관을 타고 바이러스 하나 길을 만든다. 낮잠에 든 동안 아득한 파동이 둥근 그늘을 만들고, 그늘 속으로 긴 복도를 냈다. 내 몸 깊숙이 파고드는 바이러스의 입김. 하루가 힘겹게 저물어 갔다. 안이 지독하게 저물어야 윤곽을 드러내는 통증, 통증의 바닥까지 내려가야만 소생의 근원을 얻는 이 아름다운 질서를 바라보는 일, 깊어간다는 것도 이런 것인가 온 몸의 뼈란 뼈들은 죄다 수근거리는 한 낮, 독하게 지은 말간 약을 먹는다. 슬픔이 하염없이 안으로, 고통의 쓸쓸하고 아련한 냄새 흩날렸다. 창밖을 보니 개나리 뭉텅뭉텅 피기 시작한다. 절박한 문제들을 노랗게 새기고 몸을 흔드는 꽃들의 증언을 받아 적었다. 나는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입 다물어 발음해 본다.

 

 지독하다, 사랑

 

 


 

 

최서진 시인 / 제로의 슬픔

 

 

내 안은 서른아홉 가지 감정들로 가득해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달콤해질 때 여러 가지 비밀들로

뒤 섞이는 기분

 

부드러운 목소리를 나누는 일은 예의바른 일이지

 

우리는 하나가 되어 화폭을 채운다 다시 태어나는 꽃과 날개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처럼 이미 충분하다

 

한 꽃술 아래 오래 앉아 악수를 청하면 금세 지루해하며 색이 다른

꽃으로 날아가는 나비들

 

팔레트와 12월을 펼치자 지금 막 버리고 온 신발이 불순물처럼 녹아 있다

순서를 잃고 배회하는 표정으로

 

원색들은 보이지도 않게 된 한밤중

얼굴을 씻어도 자주 다른 색으로 호명되었다

 

엄마가 불러왔던 색깔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내부

그곳에 처음 보는 내가 들어 있다

 

당신들의 아침과 서른아홉 가지 감정과 저녁 불빛과 나와

무지개를 더하면 제로가 된다

 

 


 

 

최서진 시인 / 꽃의 방아쇠를 당긴 적이 있다

 

 

태양이 해바라기의 얼굴에 행운을 심는다

 

공동묘지를 지나다가 죽은 듯이 생각한다

 

죽은 자가 원하는 방향에 대하여

 

과녁을 정하지 않은 채 방아쇠를 당긴다

 

심장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총은 놓여 있다

 

봄날 낮잠을 자다 일어난 오후 다섯 시처럼

 

손에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지만 백일홍 모양의 희망을 손에 넣는다

 

누군가 어두운 갈색이 도는 카푸치노를 마시는지

 

갈색 냄새가 새의 뼈처럼 퍼지는 공중

 

나무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남쪽에서부터 새잎이 돋고

 

새는 두 발이 있어 낙담을 모른다

 

문득 과녁의 방향이 궁금해진다

 

누군가 꽃의 방아쇠를 당기고

 

 


 

최서진 시인

충남 보령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 문학박사. 200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 『우리만 모르게 새가 태어난다』. 201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9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김광협 문학상, 성호 문학상 본상 수상. <발견> 편집장, 다층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