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강 시인 / 버려진 북쪽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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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강 시인 / 버려진 북쪽
버려진 북쪽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북면으로 갔다 북면의 북쪽 북쪽을 버리고 남쪽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짐짓 동쪽으로 흐르는 척했다 북면에서 북쪽을 버린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강은 흐르지 않는 강처럼 보였다 북면에는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 눈은 천 년 전부터 내리는 눈이었다 북면의 북쪽 천 년을 하루같이 강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산비탈 그늘에 잔설이 남아 있었다 한 번도 녹은 적이 없는 만년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남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집들은 모두 양지바른 곳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북면의 북쪽 강변에서 나는 북망산을 향해 울었다 강 건너 북쪽 북쪽에 등을 돌리고 이쪽을 향해 우는 사람이 있었다
김승강 시인 / 미행
옆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우연히 네 뒤를 밟고 말았다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받쳐 입고 연뿌리 같은 종아리를 드러낸 채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너는 네 발목이 예쁜 걸 아니, 적산가옥 늙은 백목련 담 밖으로 흰 꽃잎 툭툭 떨굴 때 모르는 네 발목이 너무 슬퍼서 네 뒤를 밟으며 나는 또 울었다.
-시집 <흑백다방> (열림원, 2006)
김승강 시인 / 음식에 대한 예의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좀스럽다 하겠지요 바닥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는 개미도 먹고 진드기도 먹는다고 하셨죠 잔반은 개도 먹고 돼지도 먹는다고도 하셨지요 저는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버려지는 음식이 안타까워요 버림받는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죠 내가 거두고 싶어요 고아를 입양하듯이 버리려면 나에게 버려주세요 내 위가 음식물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내 몸이 음식의 고아원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상한 음식이 아니라면 저를 주세요 음식은 음식으로서 역할을 다할 때 음식인 거겠죠 그들의 역할이 다하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그게 나를 살게 하고 우리를 식구이게 한다고 봅니다
-시집 <회를 먹던 가족> 황금알
김승강 시인 / 유모차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가신다. 유모차가 비었다. 따뜻한 봄날이다. 미풍이 불고 있다. 죽기 싫은 날이다.
할머니 발걸음은 가볍다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유모차 바퀴가 구름 위에서 도르륵 도르륵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가벼운 봄날이다.
얼마 전부터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하느님이 리어카에 거름을 가득 싣고 유모차 뒤를 따라가고 있다.
-시집 <흑백다방> 중에서
김승강 시인 / 노을 속으로 돌아간 노인
노인은 오래된 미래를 향해 자전가 페달을 밟았다 오래된 미래는 노인만 갈 수 있었다 오래된 미래는 자전거를 타고만 갔다 노인은 서두르고 있었다 서쪽 강가에 도착한 노인은 오래된 미래의 문을 열어 젖혔다 나는 노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서쪽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까지 갔다 노을이 앞을 막아섰다 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노인은 거침없이 페달을 밟고 노을 속으로 돌아갔다 나는 언덕 위에서 오랫동안 오래된 미래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마을에서 오래된 우물 하나가 무너져내렸다
-시집 <봄날의 라디오>에서
김승강 시인 / 장미의 손길
술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 공중화장실은 없다. 맥주를 마신 날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귀갓길에 나서도 중간에 길 위에서 '실례'를 하는 날이 있다. 따라서 내 단골 술집과 내 집 사이 집들의 담장 안 또는 담장 위에 핀 꽃들은 내 '물건'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꽃들의 꽃잎 속에 내 물건의 역사가 잘 기록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매화가, 동백이, 목련이, 개나리가, 모란이, 장미가, 능소화가 내 물건의 퇴화와 그것이 쏟아내는 폭포수의 쇠락을 목도하면서 피고 지고 다시 피었다. 그 꽃들 중에 유독 내 물건에 관심을 보인 꽃은 장미였다: 한번은 봉고차 뒤에서 급히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는데 누가 내 손을 덥석 잡는 게 아닌가! 장미가 가시투성이 팔을 한껏 담장 아래로 뻗어 내 물건을 움켜쥐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장미는 내 물건에 무슨 흑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 내가 유독 비틀거리고 오줌 줄기가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그는 안타까웠던 게다. 그때 나는 한참 동안 장미의 손길을 가만히 놓아두었다.
-시집 <기타 치는 노인처럼> 문예중앙
김승강 시인 / 회를 먹던 가족
추운 겨울이었지만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성경책을 든 사람들이 폭풍의 언덕 위에 서 있는 교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섬 북쪽 벼랑 끝 예식장에서는 예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방파제 옆 횟집으로 회 먹으러 갔다 회는 추운 겨울이 제맛이지 펄떡펄떡 뛰는 횟감을 고르고 우리는 회가 준비될 때까지 먼저 나온 당근과 오이를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손에 쥐여주고 선창가에서 뛰어놀게 했다 회가 얌전하게 접시에 받쳐져 나오고 우리는 일제히 덤벼들어 회를 먹었다 회에는 소주가 제격이지 매제가 초장 묻은 입술로 말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여자들은 사이다를 주문했다 매운탕이 나오고 밥이 나올 즈음 교회에 갔던 형님과 형수님이 뒤늦게 합류했다 형님과 형수님은 성경책을 내려놓고 그들 몫으로 덜어놓은 회부터 허겁지겁 먹었다 저녁 무렵 폭풍의 언덕 위 교회를 향해 아내가 혼자 길을 떠났다 벼랑 끝 예식장 위로는 아버지가 비닐봉지처럼 날아올랐다 방파제 끝에서 놀던 아이들은 까마귀들에게 새우깡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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