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원 시인 / 단단한 꽃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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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원 시인 / 단단한 꽃
마음이 먹먹할 때마다 돌들의 무늬를 더듬어 보던 내 손 끝에서 들숨일까 날숨일까 파르르 어떤 숨소리가 떨려 옵니다 무늬에 따라서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꽃에 물을 주듯이 내 책장 위에 놓인 돌에게도 물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치곤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돌에게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돌이 피우는 꽃을 나는 황홀히 보곤 합니다 먹빛의 몸이 더 먹빛이 되어 베란다 한 귀퉁이에서 이윽고 숨 터지는 저 꽃들 오늘 다시 환하게 만개합니다 당신 안에 살고 있는 돌 한 그루가 기어이 만개하는,그날이 봄날입니다
박소원 시인 / 말복
“애비 죽으면 장례식에 올 거니?. 보름달이 뜬 늦은 밤. 고요히 죽고 싶구나.” 아버지는 항상 나의 꿈이었다. 남도(南都)에서 태어나 남도에서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젊은 날처럼 어색하게 서울말을 쓰는 아버지. 열 오른 내 손목을 잡아당기며 장독대를 돌고 돈다. 장항아리 뚜껑을 열고 잘 발효된 고추장들 묵은 된장들 간장들 죄다 손가락으로 푹푹 찍어 맛보여주고는 화단에 만개한 꽃처럼 얼굴을 붉히는 아버지.
새로 지은 그의 집, 내관(內館)과 외관(外館) 집밖에 잘 닦여진 주차장까지 부록처럼 모두 펼쳐 놓고는 “둘째야, 애비 장례식에 꼭 와라” 그의 집은 벽마다 문이 넓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놓고 한 걸음 벽 쪽으로 물러섰다. 그와 나의 간격이 좀 더 헐거워졌을 때, 말복 태양이 빙 둘러 친 벽 안으로 침몰하였다. 그는 아이처럼 쉽게 졸라대며, 절뚝절뚝 나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이다.
박소원 시인 / 인사동 길 위에서의 하룻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한국으로 여행 나온 여동생과 작가가 인사동 길을 걸은 어느 밤을 모티브로 쓴 시)
낮 동안 타국의 여행객들 북적거리던 길 위에서 그러나 늦은 밤 개 한 마리 짖지 않는 적막한 거리에서 너는 그림자 하나 없이 걷는다 화선지를 팔던 필방 안을 들여다보는 너는 오래된 도시의 이방인이 되었다 전통문화의 거리에서 새로 문을 연 인도 음식점을 올려다보며 문득 변화된 도시를 연민하는 너는
취객들 빠져나가는 소리들 밤바람들 홈통 뒤척이는 소리들 사고파는 일 뚝 멈춘 인적 드문 거리에서 포장지마다 적힌 검은 매직 글씨들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자들 척척 얼어붙는 거리에서 엿가게 테이크아웃 커피가게 만두가게 옷가게 꽃가게를 지나치는 너는 어둠을 문지르면 줄곧 빛을 쫓는 너는
수족관의 물고기들 갈비 집 눈부신 간판에 눈뜬 짐승들을 지나친다 번져오는 가스냄새 식당가 음식냄새를 맡는 너는 숙소를 뒤로 두고.... 내 팔을 좀 더 끌어당기는 너는 계단 바닥에서 잠든 노숙자들을 또 지나친다 어두컴컴한 귀퉁이를 돌아간다 문득 길에서 잠을 자는 시애틀의 홈리스를 떠올리는 너는 불안했던 성북동을 가슴 아파하는 너는 어둠 속에서 슬픈 얼굴을 지운다
24시간 영업 중인 편의점은 축복 넘치는 종교라며 새벽기도 일찍 나온 신심 깊은 신자라며 키득키득 팔짱을 끼는 너는 종로 거리에서 유실된 고향을 더듬거리는 너는 어둠으로 밖에 셀 수 없는 세월을 문득 증오하는 너는 길고양이의 불안한 두 눈동자를 가진 너는 길만 남은 거리에서 너는 나와 단둘이 온 밤을 걸었다.
박소원 시인 / 붉은 새벽
어머니는 2남 5녀를 낳기 전에 삼 남매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단명短命이 가족력이 될 것이라는 어머니의 불안이 줄곧 붉은 기운으로 따라 다녔다
어머니는 제삿날 생일날 새벽이면 밤새 준비한 음식을 들고 집안 곳곳에 숨어 있는 신들에게 바쳤다 따끈한 팥 시루떡과 백설기와 인절미들…… 부엌신과 변소신 토방신 장독대신 심지어 꽃밭 꽃신들에까지 집안 곳곳 손 미치는 신마다 떡 접시를 놓았다 나무 의자 돌계단 화단에 꽃, 마당 수돗가에 물, 창고에 호미 낫 빗자루 곡괭이 마루 밑 어둔 구석구석, 부엌에 젓가락 숟가락 밥그릇 대접 아궁이에 불, 긴 골목 입구에, 대나무밭가 등치 큰 아카시아 나무 밑에…… 보이는 것마다 절을 하며 자식들 제명까지 살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남은 떡 접시들 차곡차곡 채반에 받쳐 이고 그 길로 가난한 시골동네 이 골목 저 골목을 죄다 돌아다니고 새벽길을 두루 누비고 돌아오는 어머니. 가냘픈 등 뒤로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따라 붙어 왔다
박소원 시인 / 피의 가계 1973
잦은 살생의 죄는 내게 물으시고 밀양 박씨 종부인 내 며느리 상한 데 없이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원컨대 내 며느리 몸에 든 죽음을 작년에 죽은 박쥐에게 백년 전에 죽은 들쥐에게 나눠 주소서
해 떨어지는 소리들 대나무 밭 가득 차오르면 할아버지는 깃발처럼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단칼에 분리 된 오리 몸통과 목 사이에서 분수처럼 솟는 따뜻한 피, 내가 들고 있는 막사발을 채운다 병이 깊은 엄마가 창백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막사발을 받아 든다
동서남북 한 차례씩 절을 올린 할머니는 피 묻은 오리털로 며느리의 머리와 가슴과 얼굴과 등과 두 팔 마른 다리와 발등을 꼼꼼히 쓸어내린다 오리 몸통이 가마솥 안에서 끓는 동안 아궁이마다 장작 타는 소리들 요란하고 안방 구들장 데워지는 기운들 뒤란까지 훈훈하게 돌아간다
박소원 시인 / 즐거운 장례
요양원살이를 하던 오빠가 마침내 죽었다
강원도 주문진에 사는 맏누이와 경기도 동탄 수원 발안, 전라도 광주에 사는 남동생 넷과 여동생 넷 심지어 시애틀에 사는 동생까지 한밤중에 장례비 각출을 했다
다섯은 본명으로 다른 다섯은 이미 개명한 낯선 이름으로 '작은어머니나' 통장에 숫자로 찍혔다 살아서 애물단지의 죽음이 뿔뿔이 흩어져 살던 핏줄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다
장례비는 오빠의 응급실 병원비부터 그리고 화장터 사용료와 꽃값 설렁탕 값 운구차 운임 운전기사 팁 식대까지 지불하고 지폐 몇 장 남았다
박소원 시인 / 꿈꾸는 자세
많이 그리우면 고향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잔다
더 많이 그리워지면 그 꿈속에서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애벌레처럼 돌돌 몸을 말고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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