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시인 / 리아스식 외 6편
|
김산 시인 / 리아스식
빛의 입자들이 내항의 소문들을 잠재우는 저녁 죽은 사람의 발가락에 물갈퀴가 돋기 시작한다 내륙을 돌아다니며 여러 번 덧댄 구둣굽 소리 기우뚱거리며 물살의 리듬을 넘실거리고 있다 오래전 당신이 부두를 서성이며 두고 간 발 하나 망설이면서 따라왔을 그 발 하나를 사랑한 적이 있다 떠난 배의 배후를 오랫동안 밝히던 등대 사이로 찰박찰박 출렁이는 검푸른 축문이 흘러다닌다
- 『도서관, 문학관 문학작가 파견사업』(계문사, 2013)
김산 시인 / 이명(耳鳴)
귓속에서 동그란 자갈들이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대체로 나는 몸만 남은 몸을 사랑하였다 손과 발이 닳아 묵음默音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은 커다란 코끼리 귀를 가지고 태어났다 밤이면 식당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손과 발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방바닥에 엎질러지곤 했다 낮은 베개를 베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으면 몸만 남은 어머니의 몸이 커다란 귀처럼 보였다 이따금, 어머니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없는 손과 발을 나의 배 위에 툭 얹혀 놓곤 했지만 나는 애써 무거운 소리(들) 을 걷어내곤 했다
귀는 돌아누워도 귀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쉴 때, 어머니의 귀도 등 뒤에서 흐느적거렸다 웅크리고 있던 소리가 잠시 없던 손과 발을 환상통으로 느낄 때, 동그란 자갈들이 방안으로 굴러들곤 했다 어머니의 귀를 끌어안고 잠든 밤, 아침이면 어머니의 귀는 이미 공중을 떠돌았 고 나는 없는 소리(들)을 불러모아 남은 밤을 있는 힘껏 기다리곤 했다
밤, 무서운 밤, 즐거운 밤, 1985년 시월의 어느 밤 아버지는 어두움에 기대어 귓속에 소주를 들이붓고 어머니는 없는 손을 가까스로 꺼내어 내 두 볼을 쓸어내렸다 손등 위로 흐느 끼는 소리가 뚝뚝 떨어지곤 했다 전날, 빚쟁이들이 어머니의 귀때기를 잡고 연무대 시장통을 질질 끄는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나 는 없는 손과 발로 공중에서 악을 쓰며 허우적거리는 어머니의 귀를 생각했다
뭉툭한 내 손과 발은 어머니의 유일한 지문이다 나를 거쳐간 애인들은 내가 잠든 사이 나의 손과 발을 보고 모두 달아났다 나에게 뭉툭하다는 것은 닳아 없어지기 전의 비장한 결사와 같은 것 그들은 모두 뾰족한 손과 발 위에 뾰족한 장갑과 뾰족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때, 자갈들은 마구마구 내 귓속으로 내통하는 것이었다 동그랗게 부서지며 몸뿐인 몸으로 내 지문을 조금씩 지우는 것, 비로소 나는 먹먹한 귀를 갖게 되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별들은 묵묵한 귀 하나로 한 생을 부유했다
김산 시인 / 걷는 사람
눈보라가 치는 사막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갔네 어디서부터 얼마나 걸었을까, 구두창이 발바닥에 들러붙어 단단해진 굳은살 하나가 묵묵히 천천히 걷고 있었네 모진 풍파에 허우적거리던 팔다리는 죄다 닳아버렸는지,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 모리통도 잃어버린 채, 그 어떤 형체도 없는 한 덩어리의 슬픔만이 걷고 있었네 누군가는 소매를 붙잡고 앉아서 쉬었다 가라고 했지만 걷는 것이 쉬는 거라면서 어딘가로 계속 걷고 있었네 그 길 위에서 만난 기차와 구름, 흙먼지와 꽃씨들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웃으며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네 그러하면 할수록 멀어져 갔던 것들이 그를 뒤따르곤 했네 어릴 적 툇마루에 누워서 봤던 북극성 옆의 작은 별들과 큰 비가 오면 고랑 사이로 흘러넘쳤던 피어나지 못한 얼굴들 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다시금 길 위에 펼쳐지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어떤 바람의 냄새 속으로 걸었네 끊임없이 무언가가 옥죄었지만 당최 내 것은 없었으므로, 입술을 꾹 다물고 사막의 눈보라 속으로 들어가는 검은 발자국
-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에서 만난 시
김산 시인 / 입적
봄 갈 여름이 지나 어둑한 골목길에 해바라긴 아까부터 땅바닥에 엄마 얼굴 끄적거리고 집 나갔다 돌아온 열두 살 배기 흰둥이는 허연 속눈썹에 슬픔 한 바가질 묻히고 와서 죽은 어미 머리맡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개머루 같은 콧방울로 지난 시간들을 킁킁 대네 뱃속에는 밥이 적고 입안에는 말이 적고 맘속에는 일이 없어야 한다던 법정처럼 무진장한 슬픔의 연좌 위에 가부좌를 튼犬佛이랴 이러거나 저러거나 세상에서 가장 그지없는 건 돌아오지 않고 차마 멀리 멀리 돌아가는 것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큰삼촌도 돌아서 돌아서 에움길로 적막강산을 펼쳐 놓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계의 하늘과 땅을 맞이은 바람과 하늘과 수많은 별들의 저녁 품으로 돌아갔네 제 몸을 가열하게 흔들어 기꺼이 씨방을 흔드는 꽃들 하루가 덜 여문 보름달처럼 부끄러워지는 오늘밤이네
-시집 『활력』 시인의 일요일, 2023.
김산 시인 / 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앞마당의 벚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큰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잎들을 쓸기 시작하면 바스락거리며 오그라든 당신의 지문이 조각조각 바서진다 바람과 빛과 물이 일제히 분열하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검지까지 쭉 뻗은 감정선과 손목으로 가다 끊긴 생명선 그래,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빗자루가 쓸리면서 빗자루도 아플 거라는 생각에 빗자루질을 멈추고 떨어지는 잎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붙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벚나무 잎을 보면서 어디서 불어왔는지 찬바람이 오른 뺨을 할퀴고 간다 뺨으로 누구를 때렸다거나 해코지를 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기껏해야 뺨은 누군가의 뺨을 비비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온기를 나누는 게 다 일뿐, 다시 빗자루를 잡고 떨어진 벚나무 잎들을 쓸기 시작한다 빗자루로 떨어진 잎의 뺨을 비비면서 언젠가 그 뺨을 타고 흘렀을 눈물의 길을 새롭게 닦아내기 시작한다 떨어진 잎들은 결코 버려지거나 낙오한 것이 아니다 바닥에 대고 무언가 할 말이 있어 가뿐하게 하산한 것이다 더 이상 매달려 있는 것도 지겨워,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놓았다고 죽은 것이 아니듯 비로소 놓았으므로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오르는 당신의 지금을
나는,
지극히,
사랑한다
-시집 『활력』 시인의 일요일, 2023.
김산 시인 / 참깨
기다란 바지랑대로 후려치고 뭉툭한 빗자루로 쓸어 담아 방앗간에서 몇 병의 참기름과 바꿔왔던 때가 있었다
채마밭에 자갈을 들춰 보면 손톱만한 공벌레들이 꿈틀거렸고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커다란 참깨들이 기어다녔다
술만 마시면 TV 브라운관을 맨주먹으로 박살내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슬픈 참깨였음을 글도 떼기 전에 나는 알았다
할아버지가 속주머니에서 꺼내주던 말라비틀어진 참깨강정 하나를 오래오래 씹으면 단물로 환해져서 슬픔도 잠깐은 물러서곤 했다
족발 털을 밀어 가게를 꾸린 할머니가 형의 수학여행 때 주려고 참기름병 밑에 숨겨놓은 거금 일만 원을 쌔벼 강경극장까지 달렸던 적도 있다.
칭찬할 사람도 없는 우등상장을 소룡리 저수지에 꽃잎처럼 흩뿌리면 하나둘 모여든 사람의 얼굴을 한 참깨들이 뻐끔거리곤 했다.
하나의 참깨에는 한 알의 시간들이 가득 차서 늙은 어머니의 검버섯도 저리 많은 설움들로 몽글몽글 피어나는가
아직도 내 호주머니에는 참깨가 서 말이고 하루에 한 알씩 씹을 때마다 보이지 않던 것들과 들리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맑고 밝게 들어차는 것이다
김산 시인 / 연노랑 물방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연노랑연노랑은 音이 아니지. 연노랑연노랑은 色이 아니지. 연노랑연노랑 부르면 흩어진 물의 방울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지. 모여 들어서 추적추적 민중가요 식으로 행군을 하지. 개별적인 연노랑은 조그맣고 둥근 소리의 작은 균열 혹은 촌스러운 집합체. 우리의 이름은 연노랑 촛불이 되고, 우리의 이름은 연노랑 플래카드에 무심히 기록되지. 연노랑 운동화가 반 발 뒤로 전진하고 우리는 반 발 앞으로 후퇴하지. 후후 연노랑 물방울은 딱 그 중간에서 어깰 움츠리고 잠복해 있지. 어정쩡하게 서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때 밀고 밀리던 연노랑들이 하하 우리는 연노랑이다 연노랑이다 외치지. 방패에 죽봉에 연노랑연노랑은 또르르 차르르 샤샤샤 흐르지. 그때 남은 연노랑의 연대를 연노랑의 발자국이라고 해야 하나, 발자욱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광장은 많고 버스는 더 많고 연노랑연노랑은 안전해서 더욱 불안전하다는 기사는 넘치고 넘치지. 연노랑은 열노랑의 오타였습니다, 라고 정정보도를 내는 기타리스트는 없지. 소리굽쇠를 들고 연노랑 장화를 신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물방울의 나라. 물과 방울이 연노랑 막 사이에 끼여 꿈틀거리는 나라. 연노랑 물방울 기타를 들고 나는 音色을 조율하지. 조-율 조-율 도무지 섞이지 않는 당신과 나의 음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