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황성희 시인 / 안간힘의 세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9. 08:00
황성희 시인 / 안간힘의 세계

황성희 시인 / 안간힘의 세계

 

 

새날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바닥에서 쇠망치를 두드린다

망치질을 당하는 그것은 아마

납작해지는중이겠지

튀어나온 것은 들어가고

들어간 것은 평평해지는

안간힘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겠구나

 

새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

새날을 맞이하여 어제처럼 지저귈 새는

 

망치는 계속해서 새날을 두드린다

어제와 같은 날로 만들기 위해

균형이 맞춰지는 정갈한 비명이

새날 오전을 장식한다

 

어느 층에선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그녀는 이제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고

이제야말로 이 집을

박차고 나갔을 수도 있다

 

이곳에 오기 전 딱 한 번

나는 부모를 잃었고

평생 고아로 늙어가는 중이다

 

수많은 새날을 한 장씩 찢어가며

내가 기다린 것은

딱 한 번 잃어버린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머니도 모르게 자라버리고

정말 미안하게도 몇 명의 아이들을

다시 이 세계로 불러들였다

 

아직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다 자라기 전에

나는 해답은 아니어도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향

그거 하나라도 갖고 싶은데

 

누군가 대답처럼 쇠망치를 두드린다

튀어나온 눈물이 탕탕우그러지고

슬픔으로 굳은 어제가 탕탕 펴지면서

모든 사건이 평평해지는 일과를 견뎌낸다

 

울퉁불퉁 망치 자국만 남은 몸을 향해

새날의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앰뷸런스가 지나간다

 

누군가 또 길을 잃고

이 세계 속으로 추락했나

 

오랫동안 비상의 누명을 썼던 새는 그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을 뿐이었다

 

하늘은 새의 염원이 아니라 지상일 뿐이었다

 

 


 

 

황성희 시인 / 난동 직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

단 한 가지 결말을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왔다

똑같은 모양에 머무르지 못하고 매 순간 무너졌다

...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무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한 번 정도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

흔들어보고 싶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차들이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댈 때면

가장 큰 경적을 울리는 차를 향해

왜 달려들지 않겠나

 

꽉 쥔 주먹으로 차창을 깨는

구체적 사건을 저지르고

피범범 손엔 팡파르처럼

왜 경적을 울리지 않겠나

 

어쩌면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급조되었는지 모른다

 

살가죽이 째지고

뼈가 부서지는 타격감을 위해서라면

 

모든 호흡이 매도당하고 낭비되는

쓸쓸함이야 얼마든지

 

 


 

 

황성희 시인 / 콧물에 대한 신념

 

 

팔 속에서 팔이

찰랑찰랑 거린다

다리 속에서 다리가

출렁출렁 거란다

 

멀리 가로등 불빛처렴

애처롭게

몸 안을 밝히는 심장

 

이 얼굴 하나를

사실로 만들기 위해

살아온 수십 년

 

혹시 들켰을까

나는 나에게

단 한 번의 사건이라는 걸

갑자기 발길을 멈춘다

내 속에 담긴 나를 쏟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불거진 뼈마디

 

버스를 기다리는 저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포기하셨길래

아무 때나 쏟아져도 상관없다는 듯

코를 풀고 계신 것인지

 

하긴 어떤 휴지가

콧물을 의심하겠는가

 

-시집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중에서

 

 


 

 

황성희 시인 / 스승의 은혜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나무의 기억,

열매 대신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얼굴들.

 

이 순간을 포함해 분명한 것은 없나요?

내 손을 포함해 확실한 것은 없나요?

 

장군께서는 한산섬 달 밝은 밤 지키던 칼로

내 질문의 유명무실함을 단번에 베어주셨다

가슴에 숨어 있던 붉은 사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의사께서는 내 약지의 한 마디 가볍게 잘라내시곤

힘차게 짜낸 피로 이름 석 자 써보도록 독려하신다.

시간의 감옥에서는 그만한 하느님이 없다시며,

리비도를 들락거리던 심리학자께서는 즐거운 나의 집을 열창하는

어머니의 입에 오줌을 싸는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나에게

의자를 이용한 하루 3번의 자위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라 하신다.

물렁물렁한 시계의 현실적 대중화에 집착하셨던 화가께서는

내 친구의 아내를 연모해 보라 충고하시며

현실의 갈라가 없다면 초현실의 갈라도 없었겠지 콧수염을 만지신다.

이상향을 꿈꾸던 의적께서는 호부호형 속에 모든 실마리가 있다며

율도국은 다만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하신다.

한때 다방을 운영하셨던 시인께서는 권태를 이기고자 한다면

난해함은 기본이라며 불쑥 멜론을 내미시는데,

 

지금 내가 나무의 기억말고

획기적 수미상관의 창조에 골몰해야만 하는 이유

더 이상 나열한 필요가 없으니까

 

 


 

 

황성희 시인 / 다른 세계의 나와 이 세계의 유리

 

 

도대체 그들은 어디에 열광하는 것인가

 내가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이대로 유령이 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핏물 속에서 맨손으로

 피를 골라내는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능력이라도 가져야겠다

 

 결핍에서 오는 모든 증상들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세계를 어찌해보려는 의도 같은 건 없었다

 

 번번이 시간의 술수에 걸려들었던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일상이자 나의 생활

 

 나는 스스로에게

 소박한 저주를 거는 법에는 일류였지만

 거창하게 몰락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동정으로 유명해지기도 어려웠다

 

 내가 밤마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과

 은미가 밤마다 하천 산책로를 달리는 것

 

 방법은 달랐지만

 우리에겐 스스로를 소모시켜 다가올

 무언가를 예방하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진 그릇인지

 산산조각이 나고 나서도 알 수 없다면

 

 손가락을 단번에 베는 투명한 단호함과

 응답처럼 새어 나오는 피의 속도를 보라

 그것은 이 세계의 유리와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이 세계의 나와 다른 세계의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시집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2020,현대문학

 

 


 

 

황성희 시인 / 판타지 안녕

 

 

엘리베이터는 마침 1층에 멈춰 있다.

우유도 샀고 커피 믹스도 샀다.

사은품으로 머그 컵 두 개가 달려 있다.

저녁 메뉴는 결정하지 못했다.

카레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택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샘플만 먼저 신청한 것은 현명한 일.

스킨과 젤만으로 수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h에게 전화를 걸어

판타지의 유혹을 이겨내고 있다고 말하자.

장롱 속 썩어가는 머리는 택배기사 것이 아니다.

유령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외치겠다.

h, 아직도 가끔씩 목욕탕에서

항문 속으로 머리 집어넣는 연습을 한다면

그 사이 아이들이 널 찾는다는 것을 기억해.

담배냄새를 숨기기 위해 자일리톨을 낭비하면서

이 세계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야.

옆집 여자는 코끼리 코라고 그래도 일기에 쓰고 싶다면

머그컵 말고 다른 사은품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마트 앞 주정차 금지안을 작성해 보는 것도 좋아.

매워 보이는 반찬은 맛부터 보고 양을 결정해야겠지만

아이들이 바지 주머니에 김치를 숨겨오는 데는 이유가 있어.

상담 도중 코를 들이마시는 콜센터 직원에게 친절하긴 힘들지만

이 다음 올 짐 많은 누군가를 위해

엘리베이터는 마침 일층에 멈춰 있기를.

h, 우리 함께 그런 기도나 해야 할 시간이야.

 

 


 

 

황성희 시인 / 웅진코디와 다이아 반지

 

 

재채기를 한 뒤 영수증의 금액을 확인했다

신문 값이나 환경개선부담금은 아니다

저녁을 먹기 전의 일이다

물리학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돼지고기에 연루된 것이라면 실망스러울까

어쨌든 나는 신이 나 있다

고개가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진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함께 웃던 한 사람이 왜 알몸인지는 알지만

고개가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진다

발밑의 지우개를 줍기 위해서는 아니다

검게 닳은 귀퉁이의 전화번호는 알지만

저녁을 먹기 전의 일이다

껌을 씹다가 오른쪽 엄지를 구부린다

코를 긁은 것은 아니다

입 속으로 넣은 것도 아니다

치과의사의 충고를 떠올린 것은 그럼

손톱을 깎기 전과 머리를 감은 후

둘 중 하나의 다음이거나 먼저인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에는 아직 이르다

당신은 나를 알고 싶다고 했고

나는 사실만으로 나를 말하는 중이다

칫솔의 종류와 간호사의 향수가 아직 남았다

계란 프라이 속 딸기잼은 그 다음이다

화를 내고 싶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왜 같은 오늘 속에서 만날 수 없는지

아직은 내 설명을 더 들어야 한다

웅진 코디가 올 때마다 다이아 반지를 꺼내 끼는 대목에 이르면

조금은 진정이 될까

 

 


 

황성희 시인

1972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엘리스네 집』 『4를 지키려는 노력』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눈물은 그러다가 흐른다』 등. 현재 '21세기의 전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