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유미애 시인 / 눈물도 꽃이다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12. 9. 08:00
유미애 시인 / 눈물도 꽃이다

유미애 시인 / 눈물도 꽃이다

 

 

길 위에서는

눈물도 꽃이다

돌멩이들이 귀를 씻는 저녁

홀로 강을 따라가는 그림자

이름이 흐릴 때면 휘파람을 분다

아침 꽃을 물고 오는 새와

노을 속을 헤엄쳐간 물고기에게

오래된 노래를 들려준다

넓은 등은 그믐처럼 휘어지고

눈동자의 열망은 색을 잃어가지만

온몸에 새겨놓은 해와 달의 시간과

가슴속엔 찬란한 고래 한 마리

거친 신발 속, 발가락들이 만개한 걸까

그림자를 밀며 또 한 계절을 건너간 사람

발자국 위로 꽃냄새가 고여 있다

 

 


 

 

유미애 시인 / 모란

-치마

 

 

몇 번의 빚을 얻으며 이어왔나 끔찍한 생

 

수렵의 정강이를 쫙 찢어내며 육교와 지하도를 건너가는

허리 잘록한 원피스

치마 속에 잠든 은협도와 사슴과 모란꽃손매듭

 

나는 피 묻은 비단 조각을 바친다

 

창을 던지며 피리를 불며

재봉틀을 돌려온 검정치마의 그늘 앞에

육식바늘의 귀에 화살을 꽂은 초식바늘 앞에

맨 치마에 나비를 꿰매준 어미의 굽은 손가락 앞에

야생으로 던져진 첫 드레스의 눈물 앞에

 

마지막 패치코트를 펼쳐놓은 공작새 날개 앞에

나는 치마를 들어올린다

모란 속에 살던 건달과 별빛과 피리소리

치마를 나온 사슴이 어린 공작을 몰고 숲으로 든 후

돌을 죽인 꽃과 꽃을 죽인 돌 이야기로 처마가 뜨거울 때

 

흩어진 치마들에게 묻는다

해진 밑단 아래 숨은 폭 좁은 역사에 대해

제 분홍을 다 뜯어 먹히고 가벼워진 늙은 모란에 대해

부끄러운 몸뚱이를 둘러준 푸른 치마와

그 눈의 죄를 읽게 한 내 치마의 붉음에 관해

 

* 모란 : 작약과에 속한 낙엽 활엽 관목. 난을 꾀하다.

 

 


 

 

유미애 시인 / 재킷이라는 이름의 새

 

 움직이는 집이다 이미지의 문이다 깃을 세우면 탱크 한 대가 들어오고 초식지에 구멍이 뚫리지만 주인은 실패한 혁명가, 주머니 속의 잉크와 시계를 삼켰다 콘크리트 벽과 가시덤불의 동맹은 이상일 뿐

 

 허수아비를 사랑하는 재킷은 중립지의 꼭대기로 가 구름을 접는다 달팽이를 접고 코끼리를 접고 달빛 고인 창을 접고 바다의 귀퉁이를 접어 스프링노트에 풀어놓는다 그의 빗소리는 대양의 울음소리를 닮았고, 고원을 넘어온 염소는 신의 얼굴보다 천 배 많은 눈동자와 귓불을 가졌다

 

 소매 끝에서 바람이 분다 막 인쇄된 풀꽃 뭉치를 끼고 달리던 여인과 불의 워커 자국, 이제 재킷은 아침을 잃은 나팔소리며 늙은 병사의 먼 그곳, 쏟아지던 다국적 돌멩이도 열망의 불모지를 선회하던 포탄도 허구였을까

 

 거미 한 마리가 포복하던 저녁, 재킷은 들것에 실려 왔다 온몸이 벼랑이라 여겨진 순간 그는 추동할 무엇도 없이 자신을 내던졌다 모든 단추를 열어 펄럭이던 격전의 날들은 갔다 또 한 권의 초록이 발행되지 않을 이야기로 남았다 그러나 지는 꽃은 승패를 모른다

 

 벌거벗은 물체 하나가 벽 앞에서 울고 있다 최후의 과녁이었던 쇄골이 깨어난 오후, 풀의 문자가 날리고 탄피를 줍던 흉터가 덜컹댄다 꽃을 따면 펼쳐지는 등 뒤의 야생

 

 재킷이 제 안의 다친 새를 가만히 놓아준다

 

 


 

 

유미애 시인 / 범람하는 자두

 

 

늑대가 될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어

손가락을 뚫고 나오는 어둠을 벽에 바르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비틀기도 했어

허기진 저녁이 가고

새벽에 받아놓은 눈물이 질척거릴 때

나무의 어둠도 피 흘리던 이파리도 사라지고 없었지

이후 내 그늘에는 빈 의자가 놓였어

자두처럼 예쁜 계집을 갖고 싶다는 너의 뜻은

땅속 깊이를 알지 못하고

뿌리를 피해 도망만 치며 살아온 나는

지상으로부터 이십 센티 위에 떠 있어야 했으니

야성을 잃어가는 발톱과 절룩거리는 의자의 이야기는

끝을 알 수 없었지

자두를 꿈꾸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새로 못질한 의자 위 의혹의 접시가 흔들리는데

푸른 쪽이든 썩은 조각이든 버릴 수가 없네

상처 줄 맘 없었다는 너의 말이

아직 저 붉은 원 안에 살고 있으니

라면 박스를 뚫고 나온 울음소리가 귓속을 돌고 있으니

 

 


 

 

유미애 시인 / 기타를 메고 어디론가 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소년은 언제나 기타와 함께였다

 

이별을 연주한 적 없는 그가 다른 별로 떠날 때

나는 비밀 악보를 입에 넣고 피 맛이 날 때까지 굴렸다

한 숟갈의 꽃말과 침이 겉돌던 봄이 가고

뒷마당이 검은 연기로 가득 차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턱수염이 돋기 시작했다

 

삼키지 못한 노래들로 입이 무거워져 갔다

만화책을 집어던진 내가 교복에 어울리는 구두를 고를 때

외계에서 통조림을 따던 소년병의 시간은

과녁 없는 화살을 날리고 군화 속의 샐비어를 키웠다

 

지루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모의 훈련과 사이렌 소리로 메스꺼운 날들

나는 하모니카를 잘 부는 걸인에게 유니폼을 벗어주며

이 우스꽝스런 행성을 벗어날 방법을 묻곤 했다

 

마침내 운석으로 채운 배가 도착하고

오래된 옥수수 냄새와 독수리 깃털이 쏟아졌지만

기타도 소년도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어린 병사들은 겁먹은 얼굴로 국경을 넘어갔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우리가 구두에 실어 보낸 노래들은 어느 별을 걷고 있을지

 

입속의 음표를 뽑아 허공으로 던지면

기타를 메고 어디론가 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미애 시인 / 표범

-신문지에 쓴 6호 연필

 

 

바깥귀를 접은 지 오래 나는 나를 완성시킬 수 없네

위대한, 설산의 구두소리는 내 것이 아니고

신문지에 스케치한 카카리키*는 나의 나무에 도착하지 않았네

하지만 너라는 그림자는 뜻을 굽힌 적이 없지

캄캄한 그 혀 속으로 휘파람 한 토막을 건네줄게

벌거벗은 음들이 서로의 무늬를 섞을 때

마침내 내게도 객관적인 입술이 생기는 거야

붉은 달을 부르는 순간 네 안의 짐승이 깨어날 거야

피투성이의 등을 문대던 꽃나무와

떠꺼머리 굴 한 채가 너에게 속하게 되겠지

노래를 멈추지 마, 해진 자켓이 갈기를 세울 때까지

날마다 초췌해지는 내 몸의 얼룩들을 가져가

바닥과 바닥의 심장을 관통해온 이 눈물을 마셔

필갑을 열면 검은 밀림이 타오르는 밤

네 눈 속, 두 번째 달이 둥글어질 때

가라 표범

성대가 녹아내릴 때까지 변방을 달려

휘파람도 불 수 없는 밤

국적 없는 네 울음소리가 또 다른 너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멸종위기 앵무새.

 

 


 

 

유미애 시인 / 트럼펫 보이

 

 

 너는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거란다 흰 보에 싸인 내 울음소리는 담을 넘지 못했다 신이 주신 건 속눈썹이라는 낮은 지붕 하나였으니

 

 

 자두꽃이 피는 저녁, 눈 속의 물고기를 꺼내 나무에게 바쳤다 나의 시작은 자두 한 알이었으니까 자두 너머의 세계를 들려주는 건 내 손의 비린내를 쪼다 가는 새들이었으니까

 

 속눈썹에 빗질을 했다 악보 사이 짐승들이 우글거렸으나 눈 속에는 비늘을 번뜩이며 길을 묻는 음표들, 하이에나를 눕히고 발라드를 찾아오겠다 놈의 심장에 꽃을 던지겠다

 

 운석 지대로 새를 날렸다 별을 깨며, 최초의 노래를 듣겠다 돌 속으로 돌아가 마지막 악기가 되겠다

 

 자주색 달이 뜨는 밤 담장 밖으로 뛰어들 때, 이 메트로놈 소리를 따라가거라 남은 빛을 건네는 물고기

 

 다시 환해질 때까지, 나는 자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유미애 시인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 신인상 수상작〈고강동의 태양〉을 통해 등단. 시집 『손톱』 『분홍 당나귀』. 2019년 풀꽃문학상젊은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