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금시아 시인 / 오래오래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1. 24. 08:00
금시아 시인 / 오래오래

금시아 시인 / 오래오래

 

 

이미, 그립다거나 궁금하다는 것은

아직 시큼하다거나 벌써 상한 맛

그럴 때면 도착하지 않은 감정 속에

한 숟가락씩 떠 넣고 휘젓는

오래라는 천연 방부제가 있다는데

 

퇴적된 층층 옛일들 냄새조차 없다면

독특한 제 성깔마저 오래오래 발효되고 숙성되어

투명해졌다는 것,

 

해탈한 기다림처럼

천 년을 버티고 서 있는 아득한 저 은행나무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번갯불의 의도를

오랫동안 측량 중인지

반쯤 타다만 옆구리에서 탁 탁 탁

목탁 소리가 난다는데

 

오래라는 족보 속을 들여다보면

젊은 아버지 곁에 더 새파란 장정 하나

눈에 먼저 가득 차오르는데

얼굴들도 낯선 흑백사진 속에서

그 역시 안녕하며 잘 잊으며 서로 투명해지겠지

 

오래라는 슬픔을 오래오래 웅얼거리다 보면

두 음이 다정하게 손짓하는 그리움 같아서

눈썹부터 젖어오는

운명을 가늘게 말아 가늠해 본다

나는 그에게서 얼마나 오래된 시간일까

나는 얼마나 오래이어야 투명해질까

 

오래오래는

나로부터 가장 긴 유효기간이다

 

 


 

 

금시아 시인 / 내외內外라는 것

 

 

 구불구불 전나무 길은 깊어질수록 외지外地,

 

 선재길에서 손을 드는 여승들을 만났다

 열흘에 한 번씩 있는 삭발목욕을 다녀온다는데

 갓 삭발한 공양은 푸르고 눈부셔

 숲의 적요,

 파리한 두상에 미끄러진다

 

 무성생식無性生殖도 없는 자웅동체에도

 내외간이 있다면

 문득 여승들의 단호한 법복 안쪽이

 외간일 것 같다는 생각,

 

 본성本姓은 밖이라 외간과 내간 그 어느 쪽에도 버리지 못할 속세의 날짜는 꼬박꼬박 찾아와 안팎으로 집요하게 자라고

 

 모두가 민머리 제자들,

 

 제자들은 삭발목욕 가려면 절간의 뜰과 텃밭을 먼저 삭발하고 정돈한다는데, 그러나 따로 또 같은 법복의 내외간은 날짜도 불편해서 목욕삭발의 날짜조차 비구니승과 비구승처럼 엇갈린다

 

 세속의 날짜를 지운 스님들,

 

 적멸보궁 오르는 계단마다

 애써 피하는 날짜는 금세 또 거뭇하게 자라

 선재길에서는,

 가끔 마주치는 새소리 규율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성별 없는 법복의 안부가 있다

 

 “스님, 언제 삭발목욕 가시나요?”

 

 


 

금시아 시인

1961년 광주에서 출생. (본명: 김인숙)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입술을 줍다』, 『툭,의 녹취록』. 제3회 여성조선문학상 대상,제5회 강원문학 작품상, 제17회 김유정기억하기전국공모전 '시' 대상, 제14회 춘천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카톨릭문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