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 시인 / 그날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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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 시인 / 그날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어 출근하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무심코 오늘의 날짜를 쓰다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지 그날이구나! 그날의 내가 떠올랐어 그날따라 출근이 늦었지 준비하다 말고 TV를 보면서 어째어째 발 동동 구르다가 울다가 이리저리 채널 돌리다가 하루 종일 허둥대었지 밤이 늦도록 아무도 잠들지 못하고 위선과 탐욕이 뒤섞인 모순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봐야만 했었지 현실은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었어 누구도 지우지 못할 비극이 또렷이 머릿속에 박제되어 절망의 통곡을 내뿜었던… 잊지 않겠다던, 그 날이구나... 어느 새 벌써 잊은 거니
-웹진 『시인광장』 2025년 11월호 신작시
이순 시인 / 블랙홀이거나 분화구이거나
여인이라면 하나씩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 둔 우주의 중심, 그 중심에 들끓는 소문들이 궁금하여 작심하고 나선 사내들 대대는 그 블랙홀이거나 뜨거운 용암굴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더러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도 생각의 꼬투리는 한평생 그곳으로만 치닫는데
정작 그 중심은 겨울 밤하늘 그믐달처럼 한없이 고요하여 목숨도 길어 올리고 사랑도 길어 올리고 더러는 한 줄 시도 길어 올린다네
천만 길 우물 속이여 여인이여
-시집 『속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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