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용 시인 / 고드름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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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용 시인 / 고드름
고드름을 생각하다가 베드로라고 쓴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그는 외골수, 땅을 지향한 죽음 고드름 같은 몇 번의 죄가 문신이 되어 하늘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영혼을 위해 잡아도 잡히지 않는 박해를 위해 고드름도 피땀을 흘린다는 사실 물구나무선 채 죽어간 그가 저녁 무렵 소름으로 자라 내 피부에 자랐다 거꾸로 매달린다는 것과 뒤집어야 바로 보이는 것들 시체 같은 겨울, 고드름은 흔적 없이 사라질 우리의 사자 굴이다.
전선용 시인 / 눈사람
밤사이 눈이 펑펑 내렸다 밤새 조용히 내렸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눈이 왔는지 알지 못했다 눈사람은 섬뜩한 오한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졌을 것이다 눈이 서서히 녹고 있을 때 눈사람은 발가락부터 썩고 있었다 독거란 어쩌면 고독을 즐겼다는 말 혼자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몸서리쳤을 시간이 머리와 하체에 둥글게 뭉쳤다 월세가 밀리지 않았다면 눈의 퇴적물로 남을 뻔한 고독 추위에 착상된 주검이 들것에 실려 나올 때 빚만 가득했던 삶의 청구서도 문드려져 있었다 가래로 눈을 밀며 길 터 주던 주인은 혀를 차는 것으로 밀린 월세를 정산했다 눈사람의 채무 변제 방식은 간단명료하다 스스로 녹으면서 흔적을 지우는 것 첫눈치고는 꽤 많이 내리는 눈이 수군거렸지만 눈사람은 아무런 대꾸가 없다 봄까지 갔으면 눈사람은 청정하였으므로 내장까지 보여줄 뻔했다.
-시집 <뭔 말인지 알제> /도서출판 옴
전선용 시인 / 독종 흡입력 좋은 입으로 무형의 죄를 먹은 사람들이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데요 사실은 지구가 편도염 때문에 목젖이 부은 겁니다 노동자 임금을 빨아먹은 빨대가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떠다닐 수 있을까요? 속이 빈 것은 요란합니다 빨리 취하고 싶은 사람은 소주를 마실 때 빨대를 꼽기도 하지요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불법에도 과감해집니다 고래가 죽었다는 보고서를 먹이사슬이 바뀌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포식자가 빨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빨대가 독해지면 끝을 벼리고 막 달려드는데요 한 구의 고래시신이 해변으로 떠밀려올 때 지구 목구멍이 원숭이똥구멍 같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전선용 시인 /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欺妄)이다 양귀비가 가진 힘이 중독성이라면 아편은 지옥문이 열리는 무덤, 손톱 밑에 혀를 밀어 넣고 독을 빠는 동안 별은 창틀에 끼어 급사했다 황홀하게 익숙한 밤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은 마약과 같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 해무가 그녀라는 소리가 있고 수평선이 그 여자라는 전설이 있다 파랑을 견뎌낸 섬 환락의 껌을 씹는 마법은 착란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계(界) 문장의 비문처럼 난해한 점의 출처가 사내에겐 못이 됐다 저기 점 박힌 여자, 여기 못 박힌 남자, 꽃 지고 난 자리 시체 투성이다
-시집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사, 2023.
전선용 시인 / 폭설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세 푹푹 잠기는 세상것들 까불다가 식겁하고 있다 하긴 하늘도 많이 참았지 달콤한 잔소리는 고분고분 들어야 한다 술 먹느라 늦게 귀가한 죄 스리슬쩍 거짓말 한 죄 남을 험담한 죄 다 내새끼라고 허물을 덮어주시는 아량 죄가 많을 수록 잔소리가 두툼하다
전선용 시인 / 버찌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증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 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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