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전선용 시인 / 고드름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6. 08:00
전선용 시인 / 고드름

전선용 시인 / 고드름

 

 

고드름을 생각하다가 베드로라고 쓴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그는

외골수,

땅을 지향한 죽음

고드름 같은 몇 번의 죄가 문신이 되어

하늘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영혼을 위해

잡아도 잡히지 않는 박해를 위해

고드름도 피땀을 흘린다는 사실

물구나무선 채 죽어간 그가

저녁 무렵 소름으로 자라 내 피부에 자랐다

거꾸로 매달린다는 것과

뒤집어야 바로 보이는 것들

시체 같은 겨울,

고드름은 흔적 없이 사라질 우리의

사자 굴이다.

 

 


 

 

전선용 시인 / 눈사람

 

 

밤사이 눈이 펑펑 내렸다

밤새 조용히 내렸으므로 동네 사람들은 눈이 왔는지 알지 못했다

눈사람은 섬뜩한 오한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졌을 것이다

눈이 서서히 녹고 있을 때

눈사람은 발가락부터 썩고 있었다

독거란 어쩌면 고독을 즐겼다는 말

혼자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몸서리쳤을 시간이

머리와 하체에 둥글게 뭉쳤다

월세가 밀리지 않았다면 눈의 퇴적물로 남을 뻔한 고독

추위에 착상된 주검이 들것에 실려 나올 때

빚만 가득했던 삶의 청구서도 문드려져 있었다

가래로 눈을 밀며 길 터 주던 주인은 혀를 차는 것으로

밀린 월세를 정산했다

눈사람의 채무 변제 방식은 간단명료하다

스스로 녹으면서 흔적을 지우는 것

첫눈치고는 꽤 많이 내리는 눈이 수군거렸지만

눈사람은 아무런 대꾸가 없다

봄까지 갔으면 눈사람은 청정하였으므로

내장까지 보여줄 뻔했다.

 

-시집 <뭔 말인지 알제> /도서출판 옴

 


 

전선용 시인 / 독종

흡입력 좋은 입으로 무형의 죄를 먹은 사람들이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데요

사실은 지구가 편도염 때문에 목젖이 부은 겁니다

노동자 임금을 빨아먹은 빨대가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게 떠다닐 수 있을까요?

속이 빈 것은 요란합니다

빨리 취하고 싶은 사람은 소주를 마실 때

빨대를 꼽기도 하지요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불법에도 과감해집니다

고래가 죽었다는 보고서를 먹이사슬이 바뀌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포식자가 빨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빨대가 독해지면 끝을 벼리고 막 달려드는데요

한 구의 고래시신이 해변으로 떠밀려올 때

지구 목구멍이 원숭이똥구멍 같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전선용 시인 / 미녀이거나 마녀이거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봤다는 말은 기망(欺妄)이다

양귀비가 가진 힘이 중독성이라면

아편은 지옥문이 열리는 무덤,

손톱 밑에 혀를 밀어 넣고 독을 빠는 동안

별은 창틀에 끼어 급사했다

황홀하게 익숙한 밤

마법에 걸린 연애 습성은 마약과 같다

점 하나를 숨기고 유유히 바다로 간 미녀

해무가 그녀라는 소리가 있고

수평선이 그 여자라는 전설이 있다

파랑을 견뎌낸 섬

환락의 껌을 씹는 마법은 착란이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계(界)

문장의 비문처럼 난해한 점의 출처가

사내에겐 못이 됐다

저기 점 박힌 여자,

여기 못 박힌 남자,

꽃 지고 난 자리

시체 투성이다

 

-시집 『그리움은 선인장이라서』, 생명과문학사, 2023.

 

 


 

 

전선용 시인 / 폭설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세 푹푹 잠기는 세상것들

까불다가 식겁하고 있다

하긴 하늘도 많이 참았지

달콤한 잔소리는 고분고분 들어야 한다

술 먹느라 늦게 귀가한 죄

스리슬쩍 거짓말 한 죄

남을 험담한 죄

다 내새끼라고 허물을 덮어주시는 아량

죄가 많을 수록 잔소리가

두툼하다

 

 


 

 

전선용 시인 / 버찌

 

 

벚꽃이 낙하하고 얼마 뒤 버찌가 떨어졌다

 

말하자면 벚꽃은 전조증상

팔랑개비 같은 꽃잎은 쓸려갔지만

버찌는 콘크리트 바닥에 할 말을 거뭇

거뭇 남겼다

 

그들만의 언어로 보도블록에 눌러앉은 종족의 유서들

스타카토같이 찍힌 무성한 말 줄임

대를 잇는 증표다

 

잘 살아라,

 

아버지가 남긴 호흡도

내게 거뭇거뭇 남았다

 

 


 

전선용(全善勇) 시인

2015년 《우리詩》를 통해 등단. 시집 『뭔 말인지 알제』 『지금, 환승 중입니다』. 제11회 복숭아 문학상 시부문 대상, 2015 근로자 문학제 시부문 입상, 제6회 포항소재 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제4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시부문 입상, 제16회 용인문학 신인상 시부문, 제9회 농촌문학상 시부문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