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락 시인 / 자명自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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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락 시인 / 자명自鳴
원시의 어떤 부족은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후 새벽이면 귀부터 먼저 열려서 창밖으로 나가곤 했다 새벽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의 종소리, 일 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실어 나르는 새벽 첫차의 엔진 소리에 섞여 가끔씩 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도 했던가 여명의 배후에는 그렇게 여러 소리의 냄새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중에 나는 새소리를 빛의 소리로 듣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빛에 민감한 종족은 가장 높이 나는 새들일 테니까 하늘의 소리 시원에는 새가 있다고 작정한다 하지만 새벽하늘이 밝아오는 소리라니! 바람도 가지 못하는 공중에 걸린 나도 모르는 울림판이 있는 것일까 새는 밤의 미로를 깃 속에 품고 있다가 지상에서 가장 먼저 그 빛을 감지하는 것이 아닐까 그 빛의 목젖을 순결한 부리로 쪼아대는 자명自鳴이라니! 스스로 밝아오지 않는 자에게 새벽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빛에는 냄새가 없다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고 만다 나는 휘발성의 새소리를 들으며 잠이 깬다 빛이 내 몸에 들어와 지난 밤 내 꿈을 밟고 왔던 어지러운 별자리도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창을 열고 새소리 나는 곳을 본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가려서 그 소리의 시원 보이지 않는다 푸른 나뭇잎 음표만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저렇게 스스로 울면서 자기를 감출 수 있는 자의 경지란 무엇일까 나는 그 나무 위에 내 푸른 귀를 올려놓고 새소리는 이제 잠에서 막 깨어나는 어린 아들의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쫑알쫑알 다시 아침을 시작한다
신현락 시인 / 빗방울버스
비 오는 버스에서 시비가 붙었다 차를 잘 못 탔으니 중간에 내려달라는 손님과 내려줄 수 없다는 기사와의 언쟁 끝에 누군가의 입에선가 너, 나이가 몇이냐?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나이가 왜 나오니? 라고 되묻는 입장에서도 세월이 주는 무게를 알고 있는 듯 그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고 비가 오는 벌판 한 가운데 손님을 내려주고 버스가 다시 출발할 때쯤 나는 새삼스레 버스를 잘 못 탄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나도 그만 여기서 침묵하든가 아니면 하차해야 하는 나이는 아닌지……
사람들은 나이를 숫자로 기억하지만 나는 저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서사로 기억한다 빗방울이 흘러내린 자리로 또 한 방울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그 아득한 시간의 서사에서 거기 처음처럼 다시 태어나는 몇 소절의 노래들, 그리운 이름들로 기억한다 물론 버스를 잘 못 탄 저 손님처럼 중도하차한 이름도 있다 그 이름들이 하나둘 지워지는 생의 지평선에 가끔씩 구름이 뜨곤 했다 누가 나에게 나이를 물어온다면 나는 구름을 들어보이리라 그리고 되물으리라 내 이름과 당신 이름 사이에서 어느 것이 구름의 나이인지……
몇 개의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진 건 불과 몇 정거장 전 일이다 아직까지 몇 억 광년 떨어진 빗방울별에게 가 닿은 부음은 없었다 그건 아주 먼 마지막 이야기이다 처음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의 꽃잎을 서정이라 한다면 처음과 마지막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단지 중간만 있는 서사라면 나는 언제든지 내 나이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내리는 비를 이야기 할 때 당신은 어제 내린 비를 이야기 한다 내가 내일 내릴 비의 예감에 눈이 젖어 있을 때 당신은 오는 비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릴 것이다 끝내 당신이란 이름으로 기다릴 것이다
빗방울의 서사에서 흘러가지 않은 사랑은 없었다 모든 사랑은 내 스스로 떠나오거나 어쩔 수 없는 중력에 의해 떨어지던 빗방울 같은 것이었다 해도 꽃잎 같은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당신의 계절이 있었다 그 많은 이름과 빗방울꽃잎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이 버스는 종점이 있겠지만 한때 동승했던 빗방울의 짧은 이야기의 끝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불안한 희망 속으로 불려나온 한 방울 눈물의 서사에게, 나는 침묵을 염주알처럼 매만지며 앞으로 몇 정거장을 더 갈 수 있을지 물어 보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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