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그루 시인 / 구두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9. 08:00
김그루 시인 / 구두?

김그루 시인 / 구두

당신이었습니다

파출소 안에서 건너편 담뱃가게를

활시위 떠난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

흙먼지를 훑고 지나온 듯한 밤색 양복에

검정 고무신 탑새기 같은 반백의 머리

당신이었습니다

동네에 양복점 생기고

너도나도 양복 한 벌 맞춰 입을 때

마지막까지 망설이다

맞춘 양복 입고 처음 간 곳이 파출소라니

누나가 단골 미장원에서 돈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양복에 신을 구두가 없어 검정 고무신 신고

젊은 순경 앞에서 연신 머릴 조아리던

당신이었습니다

​늦은 밤에 돌아와 마른 세수를 하며

아침엔 괜찮았는데 고무신이 헐떡거린다고 하시던

그때 다짐했습니다

이 담에 돈 벌면 제일 먼저

삐까뻔쩍하게 광나는 구두 사드리겠다고

​첫 월급 타서 산 검장구두가

당신과 발 한번 맞춰보지 못하고

먹물 같은 시간 속에 엎드려 있습니다

​-계간 『시와산문』 (2025년 봄호)

 

 


 

 

김그루 시인 / 도라지 미용실

 

 

 장마가 시작되면 읍내 미용사는 닭뼈 같은 롯드와 가위 서너 개 그리고 파마약을 챙겨와 부녀회장 댁 대청마루에 간이 미용실을 차렸다 동네 여자들은 아침나절 부리나케 뒷산에 올라가 도라지를 캐와 까면서 머리를 말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머리를 미용사가 연신 밀어 올리며 머리를 뽂는 동안 깐 도라지는 막 시집 온 그녀들처럼 뽀얬고 도라지 진액으로 물든 손끝은 식은 보리밥처럼 검었다 며느리가 자꾸 밥 안 준다며 도라지 껍질을 먹는 치매 걸린 양순이 할머니를 밀쳐두고 역한 파마약 냄새에도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외양간 새끼 밴 소의 배에 가 닿아 배가 움찔움찔 하기도 하였다 저녁나절 그녀들의 머리는 하나같이 풀리지 않는 가난처럼 뽀글뽀글했지만 뒤에서 보면 다 예쁜 그녀들이었다

 

 지금은 긴 장마에도 뒷산 도라지꽃만 한갓지게 피고 진다

 

 


 

김그루 시인

1966년 생 본명: 김미옥. 2023 《문예바다》 가을호 신인상 등단. 2024년 아르코 문예진흥 기금 수혜. 대전맹학교 교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