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노준옥 시인 / 반가사유로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9. 08:00
노준옥 시인 / 반가사유로

노준옥 시인 / 반가사유로

 

 

나를 오늘 여기에 앉아 있도록 도와주지 않은 것이 있던가

 

멀미와 구역질과 저 구름과

비 오는 밤의 정전과 미친 봄날 한 조각과

들찔레와 여우 소리와 저 나비와

시궁창의 쥐새끼와 고양이의 파란 눈빛과

번개와 이슬과 물거품과 파도와 그림자와

너의 오온과 너의 아름다운 사대와

너의 색성향미촉법과

 

나를 나이도록 도와주지 않은 것이 있던가

이제 가만히 꺾어라 너의 손 저 아름다운 각도로

 

-시집 <모래의 밥상>에서

 

 


 

 

노준옥 시인 / 물어뜯긴 시

 

 

강아지 미셸이

시를 물어뜯어 놓았다

노트에 적어놓은 <이런 집을 짓고 싶었네>라는

초고를 맘껏 씹어 놓은 것이다

 

미셸 눈에도 내 시는

개똥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어뜯긴 시는 며칠이 지나도록

심장이 씹힌 채로 팔다리가 찢어진 채로

눈만은 살아있어 애처롭게 날 쳐다보고

으으으...소리내며 신음하고 있다

 

<머...머..#...집...*?&#...네...그...>

이렇게 물어뜯긴 채로

아직 이만큼 살은 목숨이락 꿈틀거리고 있다

시가 되어보려고 집이 되어 보려고

발버둥치며 애원하고 있다

 

매를 맞은 미셸이 꾸역꾸역

먹다만 시를 토한다

<가출>미라 제목이 변한

찢어진 시를 토한다

 

-제5회 <시와 사상> 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노준옥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단국대 영문과 졸업, 2001년 《시와 사상》을 통해 <나는 그녀를 연구한다>로 등단. 현재 『시와 사상』 편집장. 시집 『모래의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