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연순 시인 / 적멸(寂滅)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0. 08:00
한연순 시인 / 적멸(寂滅)

한연순 시인 / 적멸(寂滅)

 

 

붉은 사과 한 알

누군가의 혀에서 달콤하게 사라진다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

누군가의 체온에서 오동꽃 의자로 죽는다

붉은 황홀 사과의 맛

낡은 황홀 의자의 품

어제 벗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무너졌다

다시 한번 하늘의 어머니가 심장에서

까맣게 무너졌다

주르륵 주르륵 기도문을 외우며

대웅전 처마가 눈물을 흘린다

우리를 세상에 내어 준 어머니가

푸른 잎사귀 빗방울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내려가신다

 

 


 

 

한연순 시인 / 빈집 앞이 환하다

 

은행나무 한 그루 두고

그는 떠나갔다.

자물쇠에 쇳물이 흐른다.

갈라진 벽 사이로

함께 살던 벌레들

쪽문 앞 한 줌 햇살에

무성히 싹 트는 씨앗들

은행나무 한 그루

몇 년째

빈집을 환하게 밝히며

주인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연순 시인

전북 정읍 출생, 전주교대, 인천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2000년 월간 《조선 문학》 시부문 등단. 시집 『방치된 슬픔』 『공기벽돌 쌓기 놀이』 『돌담을 쌓으며』 『분홍 눈사람』. 조선시문학상, 인천PEN문학상 수상. 2021년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