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주희 시인 / 간편한 산책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1. 08:00
이주희 시인 / 간편한 산책?

이주희 시인 / 간편한 산책​

 

바닥에 열중하고 있는 비둘기들을 구경했다

우리 엄마 같아

네가 말하는 엄마가 비둘기는 아니겠지만

공원엔 언제나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고

나무마다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달려있다

비둘기는 우리를 해치지 않아도

두려운 것이다

뭐라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나무 아래나 건물의 안쪽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그늘과 비슷하니까

나중엔 나도 저러고 있을 거야

네가 던진 단순한 농담인 줄 알았다

운동기구에 올라가

제자리 달리기를 하며 땀을 흘리는 너를 보면

그런 미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두 팔과 등을 강화시키는 운동기구에

열정을 안고 매달린다

오른쪽으로 반원을 그리고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다가 갑자기 달려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비둘기를 구경하는 너를 바라본다

킥보드를 탄 아이가 지나간다

너는 엄마가 집에 올 시간이라고 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어두워지는 공원을 나서며

우리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나락을 바라보았다

웃는 소리를 들었다

공원 밖으로 달려나가는 아이들

열중은 멈출 줄 모르고

미끄럼틀과 건물 안쪽에 모여 우리를 못 본 척

의식하고 있다

밤새도록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외풍기와 베란다, 거실과 머리맡에 앉아서

먹이를 뿌리고 비둘기를 부르는 너는

꿈속에서도 달리고 있다

운동기구 위에서 폐활량을 키우고

아령을 들면서 근육을 단련시킨다

죽었는데도 멈출 수가 없어

내게도 이런 열정이 남아 있다니

나는 단순히 꿈속의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음날에도 우리는 만났다

모여있는 비둘기와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넘어졌다가 갑자기 일어나 달려나가는 킥보드를 보았다

어제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이 다 모였지

앞으로도 자주 보기로 했어

우리 중 누군가 그런 말을 했고

운동기구엔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주머니에서 먹이를 뿌리는 사람처럼 공원을

걷다가

공원의 바깥으로까지 걸었다

비슷한 그늘을 가진 나무와 건물과 사람이 가득했다

네가 사라진 거리는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이주희 시인 / 아버지의 일기장

 

 

잎사귀 떨어진 담벼락

점점이 까맣다

한때 여름이다가 붉어진 담쟁이덩굴

벋어나간 발자국이다

 

올라가야 할 벽은

한 발짝 떼고 돌아보면 아득한 벼랑이었다

 

뜨거운 태양도 견디고

바람의 해찰도 안간힘으로 버텼다

선선히 부착근을 받아주지 않는 벽은

빙벽보다 단단했지만

뿌리를 박았다

 

담벼락에 까만 잉크가 찍혀 있다

 

숫눈 위의 발자국처럼

한 줄기 바람에도 날릴 것 같다

 

-2012년 <시인정신> 봄호

 

 


 

이주희 시인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6년 『시평』 가을호 신인 1차 당선. 2007년 『시평』 겨울호 신인 당선. 시집 <마당 깊은 꽃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