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미린 시인 / 라의 경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2. 08:00
안미린 시인 / 라의 경우

안미린 시인 / 라의 경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

 

 


 

 

안미린 시인 / 예상일기

 

 

날짜 없는 일기를 펼쳤다. 사월 같기도 하고 유월 같기도 한 계절 어딘가

 

왜 벌써 눈을 기다리는지 묻는 날씨.

 

내 일기의 미래를 엎질렀다.

뒤집힌 유리컵을 일으키는 아침에,

빈 컵에 하얀 입김을 부는 오후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키는 밤에

빈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두면 그 빛은 일상의 미래였다.

 

왜 아직 눈을 기다리는지 묻는 기억.

 

환한 기억 속에 이른 날씨가 가득했다.

눈이 오면 쌓인 눈 위로 떠날 수 있다는 듯이,

들뜬 그림자를 식히고 싶다는 듯이,

사월 같기도 이월 같기도 한 계절 어딘가

흰 눈으로 머리를 감았던 적이 있겠고....

 

페이지에 유리 빗을 끼워두었으니

 

가지런히 빗기는 예상 일기들

 

-월간 《현대시》 2022년 5월호, '신작특집'에서

 

 


 

안미린 (安美鱗) 시인

1980년 서울에서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첫 시집 《빛이 아닌 결론을 찢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