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린 시인 / 라의 경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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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린 시인 / 라의 경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 당선작
안미린 시인 / 예상일기
날짜 없는 일기를 펼쳤다. 사월 같기도 하고 유월 같기도 한 계절 어딘가
왜 벌써 눈을 기다리는지 묻는 날씨.
내 일기의 미래를 엎질렀다. 뒤집힌 유리컵을 일으키는 아침에, 빈 컵에 하얀 입김을 부는 오후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키는 밤에 빈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두면 그 빛은 일상의 미래였다.
왜 아직 눈을 기다리는지 묻는 기억.
환한 기억 속에 이른 날씨가 가득했다. 눈이 오면 쌓인 눈 위로 떠날 수 있다는 듯이, 들뜬 그림자를 식히고 싶다는 듯이, 사월 같기도 이월 같기도 한 계절 어딘가 흰 눈으로 머리를 감았던 적이 있겠고....
페이지에 유리 빗을 끼워두었으니
가지런히 빗기는 예상 일기들
-월간 《현대시》 2022년 5월호, '신작특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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