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기혁 시인 / 턱선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3. 08:00
기혁 시인 / 턱선

기혁 시인 / 턱선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기혁 시인 / 나르키소스와 물고기

 

 

흐르는 물결 위에 글씨를 쓴다

 

또박또박

백지를 떠올리며 쓴 문장들이

손끝을 밀고 떠날 때

 

나는 그것이

허구를 향해 번져나가는

물고기 떼인줄 알았다

 

서로의 아가미를 들락거리는

투명한 굴곡에 몸을 내맡기고서

타인의 속내로 직진해 온

햇살의 화창에 비늘을 반짝거렸다

 

물고기들은 사랑을 모르고 있으므로

촘촘한 이별의 은유로도 연민

가득한 비문으로도

그물을 만들 수 없었다

 

하구를 지나

까마득한 적도의 바다 한복판에서 문득

하다 만 말들이

지느러미를 붙들 때

비로소 글씨와 함께 번져버린 한여름과

그 풍경 위로 떨어진 몇 방울

눈물을 기억한다 고백은

 

물고기를 모신 자들의 눈거풀 같은 것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

별빛의 고요에도 비린내가 난다

 

회귀하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가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폐허가

시냇가까지 따라온다

 

쓴다는 본능을 좇던 물결에 얼굴을 디밀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상처들과

구겨진 삶의 필름을 어루만진다

사랑을 모르는 자의 표정으로

거울 속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기혁 시인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졸업. 2010년 계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평론).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등. 2014년 제33회 김수영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