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현 시인 / 마트료시카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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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시인 / 마트료시카
내 배를 가르고 지나가는 선 그 안에서 아이를 꺼내고 엄마를 꺼내고
내 배를 가르고 지나가는 선 슬픔과 주머니를 달고 오는 아기들 그들의 뼈와 재 꺼내고
층과 층 사이에서 계단과 계단에서 몰래 입 맞추는 사람들 오늘 밤에는, 중얼거리며 때를 노리는 노름꾼, 부랑자 꺼내고 그들의 기이하게 빛나는 눈빛 꺼내고
내 배를 열어 그 안의 나선 계단을 내려가면 약국과 시장이 있고 시장의 마술적인 술렁임과 불빛 있고
아이가 더 어린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고 아이를 낳는 기이한 서사의 움직임
서사적으로 만들어지는 계단과 계단의 서사
선언하고 집을 떠나는 소녀들 그런 소녀들이 낳은 수녀들
소공녀와 수녀와 어릴 적 다락에 버려져 자라난 자매 이야기들 내 손을 잡아 끌고
불 탄 광경 날아오르는 재 강렬한 눈빛의 여자들 먹이고 입히던 여자들 꺼내고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땋은 머리가 땋은 머리로 길게 늘어뜨려 망토처럼 휘두르던 그 긴 머리카락들로
보자기 만들고 헝겊 만들고 이불보 만들어 지어서 긴 옛날이야기를 만들고
옛날 옛날에 쫓겨난 바리데기 이야기 길 떠난 백설공주 이야기 옛날 옛날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서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들 이야기
나는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 이야기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뱀파이어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폭풍 같은 이야기 영혼과 신 이야기
저기 봐
죽고도 죽지 않고 죽지 않고도 죽은 영들 껴안고 껴안고 안기면 춥지 않고 다시 불을 피우고 둘러앉고 불길이 되고
불과 재 피와 눈물을 지어 끓인 이야기 끊어졌다 이어지는 주파수 같은 이야기 주름 같은 이야기
계속한다 하고 있다 여자들이 하고 있다
그 너머로 어린 내가 더 어린 나를 내려다봅니다 분열하고 분열하여 어린 내가 더 어린 나를 그보다 더 어린 나를 -계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발표
주민현 시인 /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아주 슬픈 모리츠씨는 일생에 두번 넘어졌다;
대입 시험에서 한번 고객사 미팅에서 아주 큰 재채기를 해서 또 한번
아주 슬픈 모리츠 씨
양말없이 구두를 신은 해가 뜬 날 우산을 든 그런 슬픈 모리츠 씨
삶과 죽음은 가고 오는 것
모리츠 씨의 할아버지가 가고 조카가 가고
무지개의 빛이 문득 빛나는 머리칼 같다
개를 데려온 사람은 해변의 개를 찍고 아이가 있는 사람은 해변에서 노는 아이를 찍고
혼자 온 모리츠 씨는 해변에 가만히 발자국을 찍는다
그런 모리츠 씨와 나는 메리 에번스*와 함께 저물어가는 해를 본다
시간을 물쓰듯 하던 시절이 있었다**
꿈속에서는 웃었던 기억이 없다 멈추어 있는 게 좋았다
조금 투박하게 겨울이 오고 있어, 말하면 시작되는 음악 눈이 오는 소리로 시작되는 언어
오랜 겨울이 오는 냄새 시작되는 냄새
양말 비누 따위를 사기에 좋은 계절 영원은 꿈 속인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모리츠 씨와 나는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
세월은 가볍게 등 밀어주는 꿈의 세신사
* 조지 엘리엇의 본명. ** "우리 삶의 저녁은, 사랑이여/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지요." (조지 엘리엇「달콤한 결말이 왔다 가네요, 사랑이여」)
-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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