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규 시인 / 금은방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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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규 시인 / 금은방
더 많은 주름을 거느린 담에 기댄 채 할머니는 꾸벅구벅 끄덕이며 청춘을 푸른 하늘처럼 펼쳐 놓는 중 햇빛은 이내 뒤따라온 햇빛에 말리면서 과거를 비쳐주지 못하고 바삐 사라진다. 가지런히 돌고 돌았다. 골목 골목은 거대한 팽이가 되어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계절은 채찍이었다. 변해야만 했다. 담쟁이는 담의 일부 잎이 또 한번 피고 졌다. 듬성듬성 낡은 시간이 덧칠해져 있다. 저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절단되고 아기들은 울었던가. 시장이 있고 두 대의 약국과 하나의 병원 많은 소리들이 숨쉬기 시작하면 할머니가 기댄 담벼락 맞은 편 금은방 앞에는 어떤 시계로도 돌려 놓을 수 없는 화려한 추억 주섬주섬 할머니가 볕에 말리고 있는 것은 꿈으로 갈고 닦은 보석인가. 서로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각자의 둥지 금은방? 그렇지 금이 바로 방이지 시계가 시간을 따라 떨어져 나가고 금은 방이 된 시계방 시침에 찔려 언제나 봄인 뻐꾸기와 목과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 주렁주렁 장신구며 보석이 저마다 제 몫을 반짝인다. 햇빛은 할머니를 찔러 보지만 더 이상 청춘은 푸른 하늘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오늘도 금 간 담벼락에 기댄 채 낙타의 등허리 같은 길을 꾸불꾸불 가는 중
고찬규 시인 / 길 안의 둥지
저마다 사연 있는 놈들이 모여 꽃과 향기와 거시기를 굴뚝도 없이 노을 혹은 거짓말처럼 피워올리는 겨울 천변 공사판 드럼통에 갇혀 몸부림치는 그을음과 언뜻언뜻 하늘로 차오르는 초저녁 불꽃을 보다보면 이곳까지 와 닿은 발길과 짝 맞지 않는 목장갑, 간혹 구색에 맞춰 뒤로 돌아선 엉덩짝이 다 내 것이요 네 것이다 이럴 때면 흔해빠진 골목길 그 따뜻한 불빛을 생각한다 타오르며 사그라지는 것들의 고단함 가까이 다가가면 꺾어져 이어지는 골목과 동그란 아랫목 이를테면 애호박 하나 달고 저물어가는 노오란 호박꽃의 한 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처럼 겨울 앞에 서 있는 겁 없음이 하루를 살아 온 자의 귀갓길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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