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근 시인 / 종점 근처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5. 08:00
김근 시인 / 종점 근처

김근 시인 / 종점 근처

 

 

지하도 주둥이를 빠져나오자

얇은 여자 하나 나를 가로막았다

여자의 텅빈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아뇨 그럴 생각 없어요

그저 잠시만 함께 있으면?

같이 자는 건 어때요?

 

외눈박이 가로등이 몇 번인가

노란 눈을 검벅거렸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았다

 

왜 하필 저죠?

이곳엔 당신 말곤 아무도 없으니까요

 

비좁은 계단으로 여자는

나를 데려갔다 내가 어두워지자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여자가 내 팔목을 잡았다

 

저...... 도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잽싸게 나는 여자를 구겨

후미진 골목에 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 얇은 여자를

찢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김근 시인 / 손 하나가

 

 

 손 하나가 왔네 차가운 손 손 하나만 황급히 목덜미를 만지고만 간 가기만 가고 본 적은 전혀 없는 손 하나가 왔네 오긴 왔는데 오자 여태 그때의 손자국 남아 있는지 목덜미 서늘해지고 소름 번지고 손 하나가 간 뒤 온몸을 내내 꺼끌거리게 하던 기분 무엇이었을까 털어도 씻어도 사라지지 않던 그 기분은 손 하나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살펴도 손 하나는 손 하나일 뿐 손 하나에는 그때의 목덜미도 남아 있지를 않는데 그때의 목덜미는 오직 목덜미만이었나 그때의 목덜미는 그때에만 목덜미였나 그때의 목덜미는 목덜미이긴 했나 아니 있었다고 말할 수나 있나 그때 목덜미는 어떤 표정도 손 하나는 보여주질 않네 어떤 손금도 오로지 차갑기만 차가움만이 제 모든 것이라는 듯 차가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요히 차갑네 놓여만 있고 온통 입김이 가시질 않던 방의 차가움 속에서 머뭇거리며 움직이던 손 입김으로만 가득 채워지던 어둠을 더듬거리던 손 하나 한번도 만져진 적 없던 몸과 터럭 한올까지 속속들이 만져지던 몸 사이에 덜덜 떨며 지나치게 살아난 손끝의 감각으로나 비로소 손인 줄 알던 손 볼 수는 없던 손 하나가 어느 몸에서 어느 몸으로인지도 모르게 그만 몸은 떼어버리고 거기서 여기로 왔나 하며 손 하나 다시 살펴도 손 하나 말이 없고 입술을 꽉 다문 채 눈보라 속에서 손 하나 따라간 적도 있었네 있었다고는 해도 실은 발자국에 발자국을 되찍으며 가고만 있었는데 손은 외투주머니 속에 숨어버려 있다고만 짐작될 뿐 있었는지 없었는지 자꾸 눈보라만 눈을 가리고 있었다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게 지워지기만 안 보이기만 찾을 수 없어 손 하나 영영 나도 지워지는 안 보이는 기분이었는데 차가움만 선명히 남아 손도 없이 내 목덜미를 만지고 갔나 그때 가서 지금 내게로 왔나 하는데 손 하나 움직이질 않네 무언가 만졌다는 기척도 없이 무언가 안 만졌다는 사정도 없이 놓여만 있고 여전히 목덜미에 소름 가시질 않고 꺼끌 꺼끌만 거려 거리는데 손의 주인도 나도 찾을 수 없네 마주한 적 없네 손 하나와 목덜미 끝내 서로 날은 점점 어스름 속으로 말도 길도 희미해지네

 

 


 

김근 시인

1973년 전북 고창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뱀소년의 외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끝을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