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황정현 시인 / 모아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6. 08:00
황정현 시인 / 모아이

황정현 시인 / 모아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기분을 아니

어둠이 불어오면 물결은 밀려가고

 

조개들은 서로를 보듬어 무덤을 만드는데

우리는 운명을 안을 수 없는 얼굴들

 

흔들리는 언덕에 목을 얹고

퀭한 눈으로 서로를 볼 수 없는 우리는

 

바람을 정수리에 담아도

입술마저 두근대지 않아서

 

구름이 내려앉으면 언덕은 부풀어 오를까

귀를 기울일수록 이웃은 멀어지고

 

불타는 숲을 보았어

아무도 다가서지 않았고

 

물속에 잠기는 아이를

누구도 안아 올리지 못했어

 

젖은 발가락은 흙 속에서 꾸물거리는데

하나둘 깨어나는 손가락들

 

슬픔이 고일 때마다

온몸에 꽃피는 구멍들

 

밤이 오면 뒤꿈치를 들어 올린다

잠시 하늘에 가까워진다

 

너무나 많은 무덤이

얼굴을 부르고 있다

 

 


 

 

황정현 시인 / 열두 명이 스물네 개의 거짓말처럼

 

 

 코스모스가 책장에 꽂혀 있어요

 꽃잎은 여덟 개

 

 꽃점을 칩니다

 좋아한다좋아하지않는다좋아해서좋아할수밖에요

 

 삼백육십오 쪽을 언제 다 읽지요

 코스모스는 너무 두꺼워서

 

 한 줄로 요약하면

 QR 코드입니까

 

*

 

 고대에는 물시계를 물도둑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법정근로시간이라 부릅니다 법정에선 피고와 원고의 발언 시간이 평등하다지요 스마트폰 알람은 상수입니까 너와 나의 거리는 변수입니다 물구나무를 서면 공중은 남아돌아요 피레네의 성은 중력에 저항합니다 가시나무가 퍼지면 풀은 자라지 못해요 개미귀신이 모래무덤을 만드는 동안 개미들은 뒷걸음을 칩니다 피라미드는 루브르 앞에도 있지요 파리지옥에 갇힌 파리가 녹기 시작합니다

 

*

 

 이른 봄 아버지는

 폭설을 만났나 봅니다

 

 발자국을 지우고

 세월을 삼키는

 

 눈 속에서

 

 아버지는

 삽을 들지 않았습니다

 

*

 

 지난겨울 남반구에선 5m 얼음덩어리가 쏟아졌고 로마인들은 하늘 문이 열릴 거라 믿었고 네로 황제는 16만 달러어치의 장마를 뿌렸고 비처럼 내리는 꽃잎에 질식한 사람들도 있었고 콜로라도에선 들장미 화석이 발견되었고 월계화를 꺾으면 찻잎 향이 나는데

 

*

 

 해 질 무렵 순록들은 먼 길에서 돌아와 소금을 나눠 먹어요 어머니는 가마솥에 수북이 쌀을 안칩니다 소풍을 간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점괘 대신 울음 우는 무녀를 본 적 있습니다

 

-시집 『바람은 너를 세워 놓고 휘파람』 파란 2024, 12

 

 


 

황정현 시인

202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