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물의 문신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7. 08:00
김신용 시인 / 물의 문신

김신용 시인 / 물의 문신

 

 

 물에도 숨결이 있다. 눈빛이 있다. 물의 주름이 아니라,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동그란 파문 같은 것이 아니라, 수면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 구름들,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간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것들은 물에 젖으면 녹아 없어지는 소금처럼 물의 흐름 속에 지워지지만, 수면에 떨어진 나뭇잎 하나의 기억으로 마치 아픈 문신이듯, 물의 내면에 새겨져 있다

 

 물의 숨결을 닮은, 눈빛을 닮은,

 

 그 한 잎의 기억은―.

 

-계간 『창작21』 2024년 가을호 발표

 

 


 

 

김신용 시인 / 도장골 시편-투명한 벽2

 

 

백지를 펴놓고 한 사흘을 끙끙대다가 첫 싯귀를 적을 때처럼

눈이 덮인 마당을 고라니 한 마리가 걸어 들어와

멀리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거실의 유리창 앞에 멈춰선다

머리를 물음표처럼 들고 갸우뚱 실내를 들여다본다

까만 머루알처럼 생긴 눈에는 실내의 풍경이 새겨지듯 떠오른다

안쪽 구석에 놓인 조그만 뒤주 하나, 그 위의 빈 꽃병 하나

벽에 걸린 <책을 읽는 밤>이라는 제목의 그림, 숨은 내 얼굴

만약 고라니가 시를 쓴다면 이런 실내의 풍경일까?

이 풍경에 이물질처럼 떠 있는 한 인간의 서사일까?

그러나 유리창은 고라니의 눈 속에 담긴 풍경을 차단한 채

그곳에 있지만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놓여 있다

나는 그 유리의 벽을 통해 고라니의 눈을 숨죽인 채 바라본다

밤사이 하얗게 눈이 내린 마당이 백지처럼 놓여 있을 때

첫 싯귀를 적듯 가만히 발자국을 옮겨놓고 싶을 때처럼

그 발자국 하나가 처음 가는 길인 듯, 처음 보는 길은 듯

그렇게 고라니의 눈 속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싶을 때

내 눈 속에 담긴 제 얼굴을 보았는지, 고라니는 놀란 듯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버린다

백지 위에는 고라니가 떨어트려놓은 발자국만 남는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발자국뿐이지만

그 발자국을 딛고서도, 그 발자국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내 발자국만 이방인처럼 서 있다

기대는 곳에 벽에 생긴다

그게 삶이다

 

 


 

김신용 시인 (1945~2026 향년 81세)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바자울에 기대다』 『잉어』 등.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상과 같은 해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