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희 시인 / 나팔꽃의 경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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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시인 / 나팔꽃의 경계
나팔꽃이 오래된 담장을 타고 기어올라간다 흘끗, 태양을 쳐다보다가 말을 아끼고 꽃봉오리 하나를 새로 피웠다
흙과 담장 사이, 담장과 하늘 사이 나팔꽃은 문득 나팔을 불어대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꽃을 하나씩 피운다
새가 흔들고 간 쥐똥나무 아래 거미가 새롭게 경계를 세운다
끝없이 흔들리고 싶은 나팔꽃의 경계는 어디인가
바람이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너무 오랜 습관 같아 불안하고 새가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돌연, 나팔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새와 바람 사이, 바람과 쥐똥나무 사이에서 나팔꽃은 문득, 말을 아낀다
박남희 시인 / 둘레를 지우는 일
반짝인다는 것은 둘레를 지우는 일일까
눈물은 글썽여 제 둘레를 지우고 바람은 반짝이는 것들의 몸 속 빛을 풀어 그 둘레를 지운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세상의 둘레가 온통 허물어져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이던 그 날,
내 눈의 둘레는 한없이 허물어져 너는 한 떨기 백합이었다가, 돌연 제 속살에 마음번지는 능소화였다가 그 자리에 덩그러니 한 채 글썽이는 속 깊은 우물을 남겨놓았다
글썽이는 우물과 그 속에서 깊어지는 별 사이의 거리가 내가 너를 바라보던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사랑은 종종 완강한 꽃의 둘레를 헐어 새벽하늘 개밥바라기별보다 더 크게 글썽이는 우물 한 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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