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하두자 시인 / 그래피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8. 08:00
하두자 시인 / 그래피티

하두자 시인 / 그래피티

 

자,

우리 시작할까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

펼쳐놓은 것은 모두 멈춰 있는 골목입니다

지워지는 것이 많은 벽에서 우리를 들춰보기 시작합니다

 

깨진 보도블록 위

부서진 평면을 다시 맞춰가며

해쓱한 벽에 깊이 박혀 있는 만만찮은 마음을 꺼냅니다

담벼락에 검은 고양이의 새하얀 울음을 새기면서

간단히 빵을 먹어요

 

서두르다 컵 안의 우유가 쏟아질 뻔했죠

이 벽이 맞아?

맞을까? 아냐, 아냐

각각의 벽에 눈높이 인사도 해봅니다

마르지 않는 붓과 물감처럼

생각나는 것과 생각 드는 것으로 완성되어가는 벽

햇볕은 아직 따사로운데요

 

벽 뒤에서 우리가 구겨질 수 있어

더 빨리 색칠을 해야 해요

등을 맞대고 상상하다 내버려두어야 할 곳이 점점 많아지면

탕진하는 늦봄의 라일락 향기처럼

스프레이를 뿌리듯 발 빠르게 움직여요

 

이 벽에서 저 벽으로 옮겨 가는 동안

내 손에서 비둘기 몇 마리 골목으로 날아올라

감쪽같아 보이는 세상도 탄생해요

 

이제는

꽉 채운 벽화에서 한 발짝 떨어지기 위해

자전거 열쇠를 풀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 보려구요

뒤로뒤로 물러나며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5년 12월호 발표

 

 


 

 

하두자 시인 / 폭설에 대한 감상

 

폭설이었다

앞집 소나무가 부러져 베란다를 치고

내게로 쳐들어왔다

앰블란스에 실려가던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의 어깨도 소나무처럼

우리 여섯 형제가 무거웠을까

앰블란스에 누운

아버지의 손이 호흡처럼 거칠었다

 

암 병동 일인용 병실

침대 밑 잘 닦은 아버지의 구두에서

분필 가루 냄새가 났다

초록 칠판과 교무일지가

이름과 직책을 버리고 병실에 누워있다

 

유리 파편을 치우며

유리처럼 쏟아진 아버지의 마음을 읽는다

병실의 오후

또 폭설이다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정원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투명한 링게처럼

눈 녹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깨진 유리창 너머

소나무 속의 빈 교실을 들여다 본다

아버지의 저녁기도도 저리 캄캄했을까

깨지고 긁힌 말들로 가득했던

알콜 냄새나던 아버지의 병상일기

미처 태우지 못했다

 

사람들이 소나무 행방을 물을 때

사진 속의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부러진 것은 나였다​

-계간 『현대시학』 2025년 봄호 발표

 

 


 

하두자 시인

1998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물수제비 뜨는 호수』 『물의 집에 들다』 『불안에게 들키다』 『프릴 원피스와 생쥐』. 한국시협, 국제펜클럽, 목월포럼 회원으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