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현서 시인 / 빙하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08:00
이현서 시인 / 빙하기

이현서 시인 / 빙하기

 

 

여자의 몸에서 별이 추락했다

달의 호흡이 쓸고 간 낯선 폐허다

조각난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발들

너무 빨리 먼 곳으로 이주해 버린 그를 찾아가는

벼랑 끝 그녀의 핏빛 울음소리

누가 그녀의 심장을 훔쳐갔을까

신이 허락한 언어를 호명해도 떠오르지 않는 위로의 말

오지 않는 내일의 모서리에서

불구의 언어들이 검은 재로 내렸다

극지의 협곡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하루가

명치 끝에 푸른 멍으로 스민다

모국어가 없는 사람처럼

발화를 잊어버린 짐승처럼

캄캄한 화폭 속으로의 하염없는 결빙

다급히, 천체의 궤도를 벗어난 낯선 행성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

 

-시집 『어제의 심장에 돋는 새파란 시간들』에서

 

 


 

 

이현서 시인 / 물도 꽃을 피운다

 

 

꽃은 피었다 뒤늦게 당도한 봄밤

기어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듯

 

언젠가 당신의 두 눈에 투명한 꽃이 피듯

빛을 채집하던 눈동자 가득 먹구름이 다가오면

물도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았다

 

까마득한 벼랑에서 하늘 무너지고 함부로 슬픔을 탕진한 채

먼 수평선 밖에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당신이

젖은 모래알로 흐느낄 때

온몸으로 달려온 파도가 꽃을 피운다

 

수많은 출렁거림으로, 몸짓으로 가지런히 해안선 따라

숭어리 숭어리 피어나는 꽃

 

구름 근처를 서성이던 기억 하나 밀물져 오는 밤

달의 종족들이 슬픔의 행간 속을 걸어 나온다

 

파랑의 날들 속

전생을 걸었던 핏빛 목숨도 캄캄했던 밤의 문장도

어느새 투명한 몸짓이 되어

무더기 무더기로 수런수런 살아오는 밤

 

 


 

이현서 시인

경북 청도 출생. 본명: 이영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육학과 졸업. 2009년 《미네르바》를 통해 등단. 시집 『구름무늬 경첩을 열다』 『어제의 심장에 돋는 새파란 시간들』. 제4회 박종화문학상 수상. 현재 『미네르바』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