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창옥 시인 / 경비실 아저씨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08:00
한창옥 시인 / 경비실 아저씨

한창옥 시인 / 경비실 아저씨

 

 

1302호 페인트칠 하던 페인트공이

남은 페인트로 한 평 남짓 경비실 지붕을

온통 녹색으로 칠해주던 날

경비실 아저씨 앉아 있지 못하고 종일 들락날락

미소 지으며 엉거주춤 뒷짐 진 몸짓으로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 본다

사정 모르는 어둠이 거만하게 툭툭치고 들어오자

지붕 위 굴뚝처럼 우뚝 선 가로등 불빛에 또 나와 본다

새끼돼지만한 랜턴을 손에 쥐고

아파트 한 번 돌고 와 올려다보고

한 바퀴 더 돌고 와 올려다보는 경비실 아저씨

고대광실도 부럽지 않은 눈치였다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의자 몇 개 나란히 놓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아보는, 때로는

그 옛날 푸르른 고향 언덕을 춘몽 속에 담는,

고개를 밖으로 길게 빼보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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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일을 알고 있었는지 다투어 꽃잎 세례를 주는

경비실 옆 도화나무

 

 


 

 

한창옥 시인 / 지문을 지우는 그녀

 

 

그녀는 치과에 가기 싫다고 했다

벌려야 하는 치과와 산부인과

나 또한 살면서 마음 한 번 벌려보지 못한 나날

세상은 앙다문 그녀를 언제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했나

사방으로 부딪치고 깨져 껍질이 벗겨져도

마을버스를 타고서야 커다란 눈 껌벅이며

백옥처럼 간직해 온 사지를

흔들림에 감추는 한 마리 사슴인 걸,

바람의 옷깃을 잡고 따라 나서는

산과 들의 까칠한 촉감에서

푸른 정맥의 플러그를 접속시키다가 늘 그렇듯

가슴 언저리에 반쪽씩 남은 진통제를 삼키며

한 줄 한 줄 지워버린 꼬리말의 빈 행간처럼

공허해 하는 길다란 뿔,

헛발 디딜까 거미줄 빌려 망을 쳐놓기도 하며

가끔은 그 줄에 걸려 허우적대는 뿔의 욱신거림

욱신거림이 탁! 터져 벌려지길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 움켜쥐고 엎드린 그녀는

혼자 접었다 폈다 구겨지는 젖가슴 아래

진 빠진 시간의 근육을 수직으로 늘려보다가

 

마지막 지문을 모두 지우는 눈빛 속에서

아직 벌리지 않는 그녀의 이빨이 보였다

 

 


 

한창옥 시인

서울 송파 출생. 1982년 '바우방' 문학동아리 활동. 2000년 시집 『다시 신발 속으로』로 시작활동 시작. 시집 『빗금이 풀어지고 있다』 『내 안의 표범』 『다시 신발 속으로』.  2017년 세종우수도서 문학나눔 선정. 중요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답교놀이. 인간문화재49호인 부친을 기린 ‘한유성문학상’ 제정. 현재 시전문지 「포엠포엠」 발행인. 편집주간.계간 『부산시인』 편집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