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다인 시인 / 겨울변주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19. 08:00
정다인 시인 / 겨울변주

정다인 시인 / 겨울변주

 

 

모든 현악기의 소리는 누군가의 영혼이다

손을 넣어 휘휘 저어 보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태어난 소리들

공중을 한켜 한 켜 저며서 일으킨 음들을 얇은 이불처럼 두르고 나는

눈 쌓인 겨울을 걷는다

푹푹 빠지는 발목에서부터 귀까지 목적지 없는 여정을 새겨 넣은

음들의 동면을 생각하면서, 영혼을 투명하게 얼리고 싶은 날들이 있다

어떤 선율은 현악기의 오래된 물관에서 생겨난다는데

보이지 않는 저 굴곡들을 안으로 옮겨 심으면 내게도 음계가 생겨날까

저녁의 눈빛으로 한 음씩 물들어가는 얼굴 위에

음계를 그려본다

제각각의 발소리로 오르내리는 영혼들이 귓속을 스치고

사그락사그락 눈이 쌓인다

눈이 쌓인다

귓속이란 악기 속 같아서 너무 많은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차가운 발가락을 하나씩 그 안에 담그면

푹푹 빠지던 걸음을 몰고 어딘가로 쏘다녔던 날들이 쏟아진다

폭설, 또 폭설

누군가의 말투 같은 눈발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나는 귀를 기울인다.

현을 건드리는 차갑고 골똘한 바람을 따라

떠도는 영혼들의 허밍,

그건 한 음씩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 끝없는 둔갑술

 

몰려오는 흐느낌은 어디에 매달아 두어야 할까

 

고개를 한 번도 흔들어 본 적 없는 것처럼,

굳은 목을 한 줄 현으로 걸고

흩날리는 긴 곡선을 어루만진다 선율이 되지 못한 말들, 폭설

또 폭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냉기를 혀 위에 올려두면 귓속엔 멀리서 들려오는

발 벗은 현들의 떨림

아직 이름 짓지 못한 내가 쏟아져 내리는 겨울 한가운데

현악기의 가지들이 일제히 운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꽁꽁 언 잠 위에 우수수 떨어지는 음표들,

 

폭설이 쌓인 현악기의 주름 속에서 가늘고 차가운 첫음이 시작된다

 

시린 발가락을 천천히 내디디면 일제히 울려 퍼지는 내 안의 겨울, 겨울

 

-현대시 2017년 5월호

 

 


 

 

정다인 시인 / 여자 K

 

 

손톱 밑의 검은 흙처럼 한 줄로 정의되지 못한

 

​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여자에요​

 

 -시집 『여자 K』 에서

 

 


 

 

정다인 시인 / 국지성 안개

 

 

 당신의 내부는 이제 당신 앞에 있지 않아 우리 사이를 둥둥 떠다니며 자꾸만 풀어헤쳐지는 보자기를 적신다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한 안개의 입자를, 당신의 슬픔은 무해하다

 

 누군가에게 닿은 적 없는 순결한 백치, 코가 맺히지 않은 눈을 껌벅거린다 서걱서걱 입안으로 허물어지는 의미를, 당신의 슬픔은 위독하다

 

 알약 같은 혼잣말을 물도 없이 씹어 삼키며

 어깨가 슬쩍, 코가 씰룩

 당신은 물이 새는 커다란 보자기

 

 세상을 향해 천천히 스며드는, 얼굴이 다 녹아버린 당신은 모서리를 둥글게 궁글린 사라져 가는 물체 안부마저 물을 수 없는 마지막 새떼

 

 새하얀 날개와 새하얀 물기와 새하얀 문장들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십이월의 말을 그러모아 잘게 부순 것처럼 아득한 당신의 눈빛을 무엇이라 부를까 우리를 둘러싸고 아직도 돌고 있는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당신이라는 낯선 이름

 

 세상이 다 들어차고도 아직 서성이고 있는

 눈 밑이 검은 당신이 투명과 불투명 사이로 천천히 투신하고 있다

 

 


 

정다인 시인

1970년 경남 진주 출생.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15년 《시사사》를 통해 등단. 시집 『여자 k』.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노이즈>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