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정옥 시인 / 상사화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0. 08:00
안정옥 시인 / 상사화

안정옥 시인 / 상사화

 

 

상사들이 뭉쳐 있네 그런 상사 몇 뿌리

 

잘라 왔네 무슨 꽃이든 찻 해는 머뭇대네

 

땅은 차가운 눈빛을 가졌지

 

뿌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땅속 머리까지

 

잔물결 치네 푸른 잎들을 지키지 못해

 

그 자리에 제 혀를 심네 뒤엉킴이 있었네

 

한참 후에 무자비한 장미 막간에 그를 향해

 

돌출하는 수십개의 꽃대인 나를 보네

 

오랫동안 상사한 담홍색의 내 혀들,

 

꽃과 잎이 등져 서로 바라볼 수 없는

 

피폐한 邑에서 나의 몫은 살아 있는 것뿐

 

상사는 블랙홀인 것을, 중력이 무한대인

 

빛도 빠져나올 수 없어 통신도 전혀 안 되네

 

그곳에서 나는 밝으며 작은 흰색별 되어

 

끝을 맺으려 하네

 

 


 

 

안정옥 시인 / 저무는 도시에 어울릴만한

 

 

이른 겨울의 5시 반쯤은 어둠과 덜 어둠의 전환

어둠은 덜 어둠이 뿜어내는 환상이다

창문을 통해 내다본, 밖이란 삶 덩어리

저무는 도시처럼 사람들도 저물어가는 장면이다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그 외 사람들

 

그렇게 막 사라진 거리는 영화의 첫 장면

첫 장면은 거의 함정이다 그 장면을 놓치면

감독이 깔아놓은 유리다리를 건너가지 못한다

한 번 지나간 사람을 되돌려 올 수 없듯이

그러니 숨죽이며 들여다볼 수밖에

 

암시의, 첫 장면에서 대부분은 결정이 난다

오래 견딘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있듯

셀레니케레우스를 막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너를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했는데, 늦게 왔나

삶이 분명해지려는데, 손에 잡힐 것도 같은데

 

영화는 종반을 향해 가는데 앞으로 돌릴 수 없다

1년에 단 하루 밤, 보름달에 핀다는 그 꽃,

처음으로 너를 이제 알아내기 시작 했는데

저무는 도시처럼 우리 모두는 전환되고 있다

관람석에 앉아서, 영화의 한 장면으로 여기듯

 

 


 

안정옥 시인

1949년 서울에서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나는 독을 가졌네』 『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 『웃는 산』 『아마도』 『헤로인』 『내 이름을 그대가 읽을 날』 『연애의 위대함에 대하여』 『그러나 돌아서면 그만이다』 등. 제9회 애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