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옥성 시인 / 배관공의 사랑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0. 08:00
김옥성 시인 / 배관공의 사랑

김옥성 시인 / 배관공의 사랑

 

 

바람에 휘어지는 빌딩 아래를

걷다 보면

배관들이 연주하는 금관악기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어요

 

느낄 수 있나요?

63빌딩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게,

자유의 여신상이 에펠탑에게,

건너뛸 수 없는 거리에 붙박여 애태우는 연인들처럼

건축물이 머언 건축물에게 전해주는

내밀한 주파수를,

 

신림동 높은 산동네 낮은 자취방에서

자려고 누우면

꿈결인 듯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 수맥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 일러줬지만

사실 나는 배관들과 공명하고 있었어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우주라서

생명이 흐르는 혈관을 수없이 품고 있다고 해요

그 뒤로 두근두근

배관들의 심장에서 내 심장으로

내 심장에서 건물의 심장으로

맥박이 공명하는

금관악기의 구슬픈 노래에 뒤척이는 밤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건물들이 공명할 때면

쇳소리 나는 생체 리듬이 허공으로 울려 퍼지며

하늘을 찢었어요

언젠가 양평 용문사에서 보았답니다

천 년쯤 살면 나무도 한 채의 빌딩이어서

은행나무 한 그루

물관과 체관이 뒤엉키며 휘파람 소리로

울고 있었어요

 

구만육천오백 킬로미터의 긴 배관을 따라

붉고 뜨거운

강물이 끝없이 흘러가는

 

내 육체 또한 한 채의 가옥이므로

그 멜로디를 잘 기억해낼 수 있어요

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푸른사상, 2023

 

 


 

 

김옥성 시인 / 참나무 경을 외는 시간

 

 

참나무 참나무 참나무……

참나무의 자잘한 이파리들이

참된 나는 무(無),

라고 경(經)을 외어준다

그 경을 따라 외다 보면

나무와 나의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겹친다

나이테 속 깊은 곳에 가두어온

반지 하나가 풀려나와

하늘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가서는

하얀 운판을 때린다

그 소리 마음속 날벌레들 깨운다

 

허공을 떠돌던 딱정벌레들

날개 접고 둘러앉아

전생의 숲에서 흘러나오는

수액을 마시고 있다

청동 날개마다

형제들의 얼굴이 떠 있다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푸른사상, 2023

 

 


 

김옥성(金屋成) 시인

1973년 전남 순천 출생.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同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2003년 《문학과 경계》에 소설과 2007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시로 등단.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학술서 『현대시의 신비주의와 종교적 미학』, 『한국 현대시의 전통과 불교적 시학』 등.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단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中. 천마문화상(1995), 대학문학상 시부문(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