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연 시인 / 죽은 소나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0. 08:00
허연 시인 / 죽은 소나무

허연 시인 / 죽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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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고 흔들리는 걸까

죽은 소나무

그 끝에 붉게 달려 있는 솔방울

그 끝의 바람

혹은 새

아니다 나는 죽은 소나무가 가져온

기억에 흔들리고 있다

해 뜨는 쪽이 아닌 곳으로

팔을 뻗었던 소나무가 있었다

그게 운명이었는지 실수였는지

저항이었는지 모르지만

소나무는 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많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유롭기 어렵다

그래도 저 소나무는

죽어서 십 년을 간다

그 자리에서

죽은 소나무들이 자유로운

그 비탈에 서 있었다

​​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허연 시인 / 그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몇 년째

아직도 그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취한 자와 취하지 않은 자의 경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걸었다.

어려운 것들은 전부 내려오는 길에 몰려 있었고

길은 능청맞았다.

아주 자주

어이없이 작은 자갈들이 길을 막아섰다.

지층에서 기어 나왔을 하찮은 알갱이들이

반짝이며 날 아프게 했다.

기억은 여지없이 기억일 뿐이었다.

거대한 것들은 차라리 돌아서 갈 수 있었다.

우회할 수 없는

이 사소한 것들이 결국

내 길을 막았다.

주워 담을 수 없이 오랫동안 작고 아팠던 것들은

내려가는 길에 다 있었다.

내가 산에 갔던 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기억도

소멸하지 않았다.

 

 


 

허연 시인

1966년 서울에서 출생. 1991년 《현대시세계》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현대문학상,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김종철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