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관 시인 / 아버지의 연필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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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시인 / 아버지의 연필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 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전영관 시인 / 내려오는 것
애인을 바꾸듯 이불을 도톰한 새것으로 덮었다. 고양이도 잠자리를 발코니에서 침대로 바꿨다 서로를 껴안듯이 털이 조밀해졌다
얼음발톱을 가진 손돌바람이 제 세상이니 추위를 수긍하라고 허공의 솜뭉치를 쫓아버린다 기압골이 가팔라지는 절기라서 약속에 늦어 비탈을 내려가는 느낌이다
사진 찍힐 때 렌즈를 바라보는 마음은 실망이 감춰진 기대감 같은 것 그런 마음으로 새벽 알람을 설정하기로 했다
상강(霜降)은 충분히 학습됐는데 모르고 서릿발을 밟아서 바삭, 부서질 때 있는지도 몰랐던 죄책감이 엎질러진다 서리는 듣는데 내려온다고 표현한 사람을 생각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까 실망도 감염되지 않는다
구부러진 채로 박혀 있는 못에게 벽이 끝까지 저항한 것이라서 허약함을 비관하지 말라고 포기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쓸모 있다며 거기에만 외투를 걸었다
그늘이 떠난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릿발이 물이 되도록 흐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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