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홍점 시인 / 언제나 언니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1. 08:00
박홍점 시인 / 언제나 언니

박홍점 시인 / 언제나 언니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동생이 여섯

 

베틀에 앉아 뚝딱뚝딱 베를 짜고

동생들 머리를 감겨 주고 묶어 주고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들고 골골이 찾아다닐 때

그의 어깨는 오른쪽으로 기울고

 

오만 원짜리 지폐를 택시 창밖으로 내던지고

어린 조카 미미의 집 커튼을 달고

 

사계절이 있듯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네 번의 쉼표와 네 번의 마침표

그는 과연 누굴 사랑했을까

미끈한 다리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용두산 엘레지를 익숙하게 부르고

 

그는 언제나 집안의 홍 반장

사랑하는 조카가 열여섯

이제는 돌아와 6인실 요양병원 침상에 누웠다

 

집안의 역사였던 그가 창밖 단풍나무 쪽으로 돌아눕는다

가을비는 연거푸 한낮의 길을 지우고

앞차의 전조등을 지운다

 

 


 

 

박홍점 시인 / 눈을 붙일 수 없어 벌판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날 때 슬그머니 날개가 돋아난다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떠나온 벌판 일종의 금단증세 출입구 비밀번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손 내민다

 

 텅 빈 휴일 물티슈를 뽑아 남아 있는 출렁임과 마우스의 지문을 닦는다 괜스레 열어 보는 냉장고 환하다 쉬지 않고 환하다 삼 년 만에 한 번씩 실시되는 정기 점검 그때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을까?

 

 까만 화병 속에서 흰 실뿌리들 밀어내며 키를 키운다 금전수라는 이름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명명이다 물 몇 방울이 책상 위에 떨어진다 떨어진 물방울이 한 번 더 투명을 닦는다

 

 책상 아래 슬리퍼는 깜깜하다 폭포처럼 빠르고 거세었던 날들 한 번도 퇴근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열정들, 어림잡아 이천이백스무 날 감정을 돌보고 표정을 살피느라 잠 못 들었던 페이지들 가파른 밤들

 

 숲으로 가는 길 마사토 위에 혹은 팔 차선 횡단보도 앞에서 늦은 사직서를 쓴다 지금은 창밖 무성했던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이 둥글어지며 습기를 날리는 중 영근 씨앗들은 도움닫기를 한다 몸에게 미농지처럼 얇았던 감정에게 맹세 같은 것을 한다

 

-시집  『언제나 언니』에서

 

 


 

박홍점 시인

1961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수학.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차가운 식사』 『피스타치오의 표정』 『언제나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