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채원 시인 / 공무도하記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6. 2. 22. 02:22
정채원 시인 / 공무도하記

정채원 시인 / 공무도하記

 

 

가는귀먹은 귀에 검은 이어폰을 꽂고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포장마차

오뎅 국물과 소주잔을 건너간다

얼얼한 목구멍으로 언 별을 잔뜩 삼키고

동짓달 그믐밤을 건너간다

은하수를 건너 건너

간신히 다시 밝은 아침

입안에 군별이 가득 들어 있다

밤새 타들어 가던 머리 풀어헤친 여인이

강을 건너간다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운 채

 

그대, 나를 건너지 마오

 

 


 

 

정채원 시인 / 레몬과 세숫비누

 

 

레몬 한 방울

금속성 생활에 떨어지면 산소가 발생하지

푸른색 리트머스를 붉게 물들이듯

붉어지는 눈자위

 

쓴맛이 나는 비누로 닦아줘요

슬픔의 단백질을 녹여

미끌미끌한 표정을 갖고 싶을 때,

붉은 적의를 푸르게 바꾸려는 듯

깨진 창문으로 날아가려고

 

물질이 다른 물질에게 고백을 내놓고

물질이 또 다른 물질에게서 상처를 받는

일상은 거품투성이

 

오늘은 산성 중성 염기성 가운데

어떤 표정이 어울릴까요?

 

눈물이 탄산과 반응할 때는 염기로

하품이 암모니아와 반응할 때는 산으로

매혹과 환멸 사이로 외줄을 타는

마음은 양쪽성 물질이 되고 싶은가 보다

 

 


 

정채원 시인

1951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등. 2018년 제2회 한유성문학상 2023년 제33회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